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열 Jan 04. 2025

바이킹 극복기

기꺼이 정점에서 몰락한다

바이킹은 엄마랑 타. 싫어, 아빠랑 타고 싶어. 아빠가 엄마보다 좋아서 같이 타자는 건 아닐 거고, 자신의 용감함을 증명할 대상은 아빠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놀이만큼은 아빠와 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걸까. 썩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올해 초 아이스링크에 갔을 때도, 아이는 내가 싫다는 데도 굳이 같이 타자고 집요하게 졸랐었다. 결국 스케이트는 함께 웃으면서 즐겼지만. 그런데 바이킹은 사정이 다르다. 스케이트는 타다가 넘어져도 기껏해야 멍이나 들겠지만, 바이킹은 사고 나면 황천길 급행, 운이 좋아도 성한 몸으로 살아갈 수 없는 기구 아닌가. 운전대를 잡을 때도 항상 교통사고를 상상하는 나에게는, 바이킹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마치 남은 생명을 카운트 다운하고 있는 시계 추처럼 느껴졌다.


그래 알았어, 같이 타자. 정말? 히히, 우리 맨 끝에 타는 거다. 오, 마이 가스레인지. 맨 끝이라니, 아빠도 엄마도 모두 바이킹을 싫어하는데 어린 친구가 왜 이렇게 바이킹을 애호하는가. 맨 끝 말고 서너 칸 앞에 앉자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제안해 봤지만 무정하게도 타협은 없었다. 사람이 좀 유해야 하는데, 갖은 회유에도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은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아이의 손에 이끌려 양 끝 칸 앉는 줄에 시무룩한 얼굴로 합류했다. 멀리 보이는 바이킹은 육중한 몸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심히 그네 운동을 반복했다.


이야, 다음번엔 탈 수 있겠다. 그러게,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탑승이 임박했다. 양 끝에 앉아 만세와 환호를 하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안간힘을 써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짜냈다. 생각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어쩌면 나는 바이킹이 무섭다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이킹은 하루 종일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었고, 탑승 시간은 불과 3분 30초였으며, 어린아이들조차 맨 앞과 뒤에 앉아 신나게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바이킹을 타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려던 처음 계획은, 고개는 드는 것으로, 그러다 눈도 뜨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이히히히, 드디어 출발이다, 신난다! (묵묵부답) 드디어 바이킹에 몸을 맡겼다. 서서히 왕복하는 녀석의 리듬에 따라 천천히 심호흡을 반복했다. 점차 각을 더해갈수록 호흡은 빨라졌지만 가능한 들숨과 날숨의 순환에 집중하며 바이킹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 효과가 있었다! 최상단으로 가까이 갈수록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그러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가늘게 뜰지언정 감을 수는 없었다. 나는 건너가는 자다. 바이킹 따위에 마른침을 삼키던 스스로를 경멸하며, 기꺼이 정점에서 몰락한다. 쫄았던 낙타는, 용감한 사자가 되었다가, 결국 즐기는 아이가 된다. 절정을 지나 움직임이 둔해졌을 즈음 해맑게 두 팔 뻗어 만세를 외쳤다. 내내 딸내미가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하나의 세계를 깨부수느라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진짜 재밌었다, 그치? 으응, 그래그래. 아이는 감흥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지 내 손을 잡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바이킹의 재미를 모르고 무서워만 하다가 죽을 뻔했어. 꼭대기에서 잠시 시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은 끝에 앉아야 확실히 크게 다가오더구나. 바이킹을 타다가 죽을 확률도 아마 교통사고보다 훨씬 낮겠지? 그동안 편견에 사로잡혀 꺼려하던 것들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드는구나. 네가 바이킹의 즐거움을 알려주었으니, 아빠도 너에게 롤러코스터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 롤러코스터 타러 갈까? 싫어. 왜? 무서우니까. 아, 뭐양.




사진 :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