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 한 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 내게 말을 건넨 감정은 분노. 저거 봐봐, 네가 그렇게 계속 얘기하는데도 똑같이 구는 거. 너 무시하는 거야. 네가 화가 났다는 걸 충분히 보여줘. 그래야 다음부터 안 그럴 거 아니야? 다음 타자는 사랑. 어린 아이잖아, 당장 바뀌지 않아. 다시 잘 타이르면 돼. 화낼 필요 없어. 습관이 들 때까지 사랑으로 인내하고 안내하는 게 부모의 역할 아닐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이를 이해해 보고자 어린 시절을 떠올렸지만 쓸모 있는 기억은 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양말을 보다가 양말이 되고 아이의 발에 신겨져 아이의 입장에 서서 결국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집에 와서 신난다. 오늘 학교는 힘들었다. 내 단짝 친구 시원이가 다른 반 애랑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질투가 났다. 괜히 시원이에게 툴툴거렸는데 걔도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 바보. 내일 내가 집에 있는 하리보 젤리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안 줄 거다, 내가 다 먹어야지. 흔한 남매 책 읽고 젤리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어야겠다. “뚠뚠아, 손부터 씻어야지.”, “씻으려구 했어.” 어휴, 나 진짜 손 씻으려구 했는데 아빠는 또 저런다. 하려구 했던 거 하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심통이 나서 하기 싫어진다. 나도 다 컸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하는 걸 엄마 아빠는 아직도 못 믿는다. 화가 난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른 책 읽어야지.
아이는 발에서 양말을 벗겨내고 욕구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든다. 분명 아이가 손으로 양말을 떨구었지만 그의 머릿속 어디에서도 양말이라는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나의 스위치가 벌컥 켜지면 다른 스위치는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단순한 세계. 뇌에 신경이 발달할수록 스위치를 한 번에 여러 개 올렸다가 내릴 수도 있겠지. 한 살 두 살 더 먹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다. 굳이 화낼 필요 없다. 해야 할 일은 할 때까지 하라고 일러주면 된다. 미래의 언젠가 아이는 집에 오면 양말을 벗어 빨래통에 넣고 손과 발을 씻은 후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을 것이다. 어라, 방문까지 닫을 필요는 없는데. 일이 잘못 돌아감을 알아차렸다. 하라고 한 일이 이루어질 때 하지 말았으면 하는 일도 따라오는 법이다.
“뚠뚠아, 양말 치워야지.” 아, 또 저 소리. 책 읽고 치우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냥 아빠가 치워주면 되지, 꼭 나한테 시킨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가 다 해줬으면서. 좀 크니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라는 일이 너무 많다. 나는 그냥 놀고 싶은데, 학원도 다녀야 하고 숙제도 많고. 이따 놀이터 가서 친구랑 놀고 싶은데, 그전에 또 숙제 이만큼 다하고 가라고 하겠지. 하기 싫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수학은 어렵다. 아빠한테 물어봐도 가르쳐 주다가 짜증만 내고. 아직 어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흥. 어린이집 다닐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고 하는 것만 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 되니까 힘들다. 다시 어려지고 싶다. 사탕 먹고, 책 보고, 놀이터 뛰어다니고, 놀기만 해도 칭찬 들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아이는 자기 나이에 맞게 잘 자라고 있다. 튼튼한 몸과 바른 심성이 보인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순간 욱해서 다그치는 일이 없어야겠다. 그 기준은 구시대를 겪은 내가 낡은 개념으로부터 길어낸 평균의 잣대일 뿐이라, 새 시대를 맞이할 유일한 내 아이가 자신의 개성을 깎아가며 비집고 들어가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라고 엄격히 요구하기보다는, 네가 바라보는 길도 가보라고 응원할 예정이다. 나는 더욱 유하고 자상한 사람이 된다. 아이가 집에 왔을 때,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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