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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소박이에 담긴 본질의 맛

무엇을 더하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끌어내는 것

by 이열 Jan 31. 2025

지인의 추천으로 진고개라는 음식점을 찾았다.


빛바랬지만 격조 높은 인상의 음식점 분위기.

세월의 풍파를 맞은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노련미 넘치는 종업원 분들이 분주하게 손님을 응대했다.


지인은 “진고개 오이소박이가 인생 반찬!”이라고 강조했었다.

‘오이소박이가 맛있어 봤자?’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운 채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그곳에는 고기, 회, 게장처럼 무난한 음식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페이지를 몇 장 넘기자 대뜸 ‘오이소박이 정식’이라는 메뉴가 등장했다.


‘오이소박이가… 정식이라고?’

내 안의 의문과 호기심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괜스레 단독 메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테니, 메인 요리에 사이드처럼 시켜 보았다.


이내 테이블 위에 오이소박이가 올랐다. 통통하고 아삭해 보이는 오이들이 한 접시 가득 담겨 있었지만, 역시 그냥 오이소박이.


그러나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의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차가운 오이가 입안에서 사각사각 아삭하게 터졌다. 매콤하면서도 시원하고, 상큼하면서도 개운한 맛.


‘이거… 요리네.’

내가 알던 오이소박이는 식탁에 곁가지로 등장해 별다른 주목 없이 사라지는 반찬. 하지만 진고개 오이소박이는 그 자체로 메인이었다.

그간 주목받지 못하던 조연 배우가, 드디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올라선 느낌이랄까.


오이소박이가 선사한 감동은 곧, 오래전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을 불러왔다.




대학생 때 처음 접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의 방황에 공감했고,

나오코의 심연에 안타까워했으며,

미도리의 건강함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독과 방황, 그리고 쓸쓸함이 내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자리 잡았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 먹는 오이’라는 별것 아닌 레시피다.


처음 오이가 등장한 장면을 읽었을 때, ‘이게 얼마나 대단한 맛이길래 굳이…?’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궁금함이 강렬히 남아 결국 따라 해 먹었다. 그리고 그 맛에 묘한 위로를 받았고.


짭짤한 간장, 고소한 김, 아삭한 오이가 어우러지는 단순한 조합.

정갈하고 소박한 맛이 내 삶에 작은 쉼표를 찍어 주는 것 같았다.




진고개 오이소박이와 상실의 시대 오이김말이,

둘 다 수수한 오이를 중심에 둔 요리였고, 모두 내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평범하고 단순하지만, 그 본질이 선명할 때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결국 핵심은 오이다. 싱싱하지 않은 오이로는 아무리 양념을 더하고 김으로 감싸도 좋은 맛을 낼 수 없는 것이다. 

본질이 중요하다. 무엇을 더하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끌어내는 것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연휴 중에 꼭 오이를 사야겠다. 싱싱한 오이와 김, 간장에 감미로운 하이볼 한 잔.

이 조합이면 명절 피로가 가볍게 풀릴 것 같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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