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기록될 때 비로소 나를 성장시키는 자본이 된다
고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 식구들, 종종 집에서도 자글자글 고기를 태운다.
두툼한 고기를 올린 팬에서 치이익 신명 나게 굽는 소리와 함께 부엌 가득 퍼지는 고소한 기름 냄새.
감미로운 향기에 기대감은 한껏 부풀고, 때 이른 식탁에 앉아 입맛을 다시며 오매불망 발을 동동거린다.
오랜만에 스테이크로 사치를 부린 그날 저녁, 와인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창가 서랍장 안에 놓인 와인병들을 훑어보다가, 소고기와 어울릴 만한 레드 와인 한 병을 망설임 없이 꺼냈다. 빠른 선택은 과거의 나 덕분이었다.
와인에 깊이 빠져 있던 기간 동안,
새로운 와인을 마실 때마다 구매처, 가격, 맛, 향 등을 사진 앱에 꼼꼼히 적어 두었다. 그렇게 일 년 넘게 기록을 쌓다 보니, 어느덧 150병이 넘는 와인 평가가 내 핸드폰 안에 남았다.
그날 내가 꺼낸 와인은 ‘아르헨티나 말벡 품종 레드 와인’으로, 메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블랙베리, 플럼류의 풍부한 과실향, 살짝 떫으면서 잔당감 약간, 바디감은 중상, 뒤에 가볍게 올라오는 오크향이 매력적. 맛있다는 소리 나옴. 소고기와 궁합 좋음. 2만 원 후반 대였다면 정말 훌륭했을 듯. 3만 7천 원. 라빈리커스토어.”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록이 없었다면,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다가 긴가민가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했을 것이다.
나만의 와인 리스트는, 와인을 찾는 지인이 추천을 부탁할 때도 꽤 유용하다.
“와인 추천 좀 해줘. 파스타랑 먹을 건데 괜찮은 거 없어?”
“그거라면 내가 전에 마셨던 이 와인이 괜찮았어. 가격도 적당하고, 맛도 꽤 좋더라고.”
과거의 나 덕분에 지금은 ‘조금 아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밀한 경험과 기록이 가끔 남을 도우며 가벼운 성취감을 선사한다.
소소하지만, 꽤 기분 좋은 보너스.
기록의 힘은 비단 와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캠핑장 후기를 남기고, 책을 읽은 뒤 간략히 감상을 적으며, 직장에서의 작은 성공과 실수를 메모한다. 그때는 단순한 ‘메모’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었다.
경험은 기록될 때 비로소 나를 성장시키는 자본이 된다.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미래의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발판이다. 때로는 대화에서, 또 다른 때는 중요한 선택의 지점에서, 내 경험치가 기록을 통해 구체적인 지침이 되니까.
좋은 경험과 꾸준한 기록이 반복되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또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 준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다르듯, 기록과 경험을 쌓아가는 한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되어 있겠지.
맛있는 고기에 훌륭한 와인처럼, 인생이라는 요리에 기록이라는 페어링을 곁들여 풍성한 여정을 만들자. 기록으로 쌓인 기억과 지식은 언젠가 내 삶이 마주칠 또 다른 무대를 빛나게 해 줄 테니까.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