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한편에 뜬 미인을 바라보네
현재 부산 동래구 수안동 동래시장 근처 남아 있는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도호부(줄여서 동래부)의 관아 건물 중 일부로, 지금으로 치면 부산시청에 해당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인 망미루(望美樓)는 동래부 동헌의 문루(門樓)로, 영조 시기인 1742년에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조선의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쓸모를 잃어 하나둘씩 헐리게 되는데, 망미루의 경우 1933년 일본인 부호 히가시바라 가지로(東原嘉次郞)가 사들여 동래 온천에 있는 개인 정원인 금강원으로 옮겨지었습니다. 『부산일보』 1933년 5월 15일 자 2면에는 "동래의 명적 망미루, 금강원(金剛園)으로 옮기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얼굴 역할을 하던 망미루가 식민지 시기가 되면서 개인의 수집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겁니다.
금강원은 1940년 동래읍에 기증되었고, 해방 후인 1965년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금강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하지만 망미루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공원 입구에 그대로 세워져 있다가, 2014년이 되어서야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원래 위치에는 이미 상가가 들어서서 돌아가지 못하고, 부득이 그 근처인 동헌 경내에 복원된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망미루'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해석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전에 먼저 확인하고 가야 할 것은 '망미(望美)'라는 이름이 붙은 누각이나 정자는 동래부 동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례가 아주 많이 있다는 겁니다.
가까운 사례로 '망미루'는 부산 수영구에 있는 경상좌수영(현재 수영사적공원) 북문[拱辰門]의 문루의 명칭이기도 하고,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 객사 옆에도 '망미루'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진주의 영남포정사 문루의 옛 현판에도 '망미루'라고 쓰여 있었고, 남원읍성 서문의 문루도 '망미루'입니다. 저 북쪽 강계에도 '망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지인인 김 모 선생님의 제보에 따르면 부산 금정산 자락인 파리봉 정상에도 망미루가 있고 별장이 파견되었다고 하는데, 지도를 보니 금정산성 남문 근처에 '망미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이와 같이 누각이나 정자 이름으로 널리 쓰이는 '망미'라는 명칭은,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시 「적벽부(赤壁賦)」에서 따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소식은 호를 붙여서 '소동파(蘇東坡)'로 더 많이 불리기도 하며, 문필가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많은 파란을 겪었던 인물입니다.
「적벽부」는 소식이 황주(黃州)에 유배 중이던 1082년 음력 7월 16일 밤 적벽(赤壁, 『삼국지』의 적벽대전으로 유명한 곳)까지 뱃놀이를 하며 쓴 시입니다. 달빛이 비치는 강물을 배를 타고 거슬러 가면서 그 감상을 남긴 것인데, 음력 날짜로 16일이었으니 얼추 보름달이었을 겁니다. 즐거운 경험이었는지 소식은 3달 후에 또 적벽에 놀러 와서 「후적벽부」라는 시를 남깁니다.
「적벽부」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시이지만, 시인은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또 한 편의 시를 읊고 있습니다.
계수나무 노와 목련나무 삿대로(桂棹兮蘭槳)
달밤 하늘을 치고 달빛을 거슬러 올라가니(擊空明兮泝流光)
아득하여라 내 마음이여(渺渺兮予懷)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편에 있네(望美人兮天一方)
여기서 '미인'은 보통 '달'로 풀이되며, '미인을 바라본다[望美人]'는 것은 '달을 바라본다[望月]'는 뜻입니다. 간혹 정치적으로 보아 '미인'을 '임금'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미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임금을 그리워한다'라고 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소식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문인들이 이 시의 구절을 차용하여 시를 써왔습니다. '미인' 뿐만 아니라 '묘묘(渺渺)'이나 '천일방(天一方)', '현상호의(玄裳縞衣)' 이런 표현이 들어가는 시는 「적벽부」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유명한 시의 구절을 차용하는 것은 한시의 대표적인 작법 중 하나거든요. 「사미인곡」·「속미인곡」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의 경우, 여러 차례 유배를 겪으며 자신이 소식과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실제 그의 작품에서도 「적벽부」의 표현을 차용하고 있는 부분이 보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망미루 명칭이 지어진 경위를 추측해 봅시다. 당시 건물이나 누각 등의 명칭은 대충 짓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유명한 문인에게 부탁하여 이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 고전에서 한 구절을 따와서 이름을 짓는 것을 우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아마 작명을 부탁받은 누군가가 전망이 좋은 곳에 있어서 달구경을 할 만한 누각에다 「적벽부」에서 차용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혹은 '임금을 그린다'는 뜻으로 풀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여러 지역의 사례를 보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망미'라는 이름이 많이 붙는 것 같긴 합니다. 머나먼 변방에 부임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지방관의 마음을 대변한달까요. 남부 지방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누각이 고을 남쪽에 있으면 달을 보는 것이고, 북쪽에 있으면 임금을 그린다, 그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