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WORLD

나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by 이탁

‘아, 언제 되는 건데?’ 유심 보호 서비스에 가입한 지 일주일째, 그리고 유심 교체를 예약한 지 사흘 가량 지났다. 여전히 세상은 유심 이야기로 들썩거리고 있으며, 통신사 측은 배짱 장사만 하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다. 피곤하기 그지없다.


대중의 원성과 비아냥은 따갑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없으면 안 되니까, 망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하여간 요새는 다 이런 식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잠깐 반짝하고 마는 세태. 오래 두고 볼 만한 세상은 아니다. 못 볼 꼴을 하도 많이 보니 절로 현기증이 난다. 유심이 나의 염세적인 내면을 건드려 버렸다.


바람 좀 쐬러 거리로 나가야겠다. 탁 트인 전망. 그러나 바뀌는 건 없다. 밖에서도 항상 쓸쓸한 기분이 든다. 언제나 사람들로 그득한 거리. 재잘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대놓고 서로 헐뜯지 않으니 포근한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잠깐 희망이 스쳐 지나갈 뿐, 머지않아 다시 악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아, 진짜 싫다’


남들 따라 하며 개성적인 척하는 태도는 언제나 못마땅하다. 저 사람 눈에는 내가 그저 떼쓰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싫다. 당신이 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싫다. 맹목적인 유행과 혐오,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혼종이다. 그것들이 서로 뭉쳐서, 약자끼리 서로 짓밟는 트렌드로 진화하다니. 갑작스레 들이닥친 찬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강자와 약자의 역학 관계는 유행에 휩쓸려 나간 지 오래. 약자는 강자에게 뺏기기만 한다는 건 케케묵은 이론이 된 요즈음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남 속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당연히 틀린 이론이지. 있는 사람들만 실컷 착취하는 것이 이치라면, 이렇게 사회가 차가울 리 없다.


여기서 갑자기 드는 의문 한 가지, 강자도 뺏고 약자도 뺏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뺏지 못할까? 내가 너무 착해빠진 탓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나도 뭐 좀 쥐면 휘두르려 들지 않을까. 푹신한 솜을 잡는다면 다행이지만, 우리의 근처에는 늘 쇠와 날붙이가 가득하다. 그러니 베고 찌르려는 욕망을 가까스로 참으며 살 여지가 다분하지 않을까.


못난 버릇 든 인간이 나쁜 세상에 아무런 분풀이도 하지 않을 리 없다. 혹은 반대로, 그저 독이 쌓인 인간이 억지로 남 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고쳐야 할 문제는, 모든 걸 비뚤게 바라보는 내 눈인 건가? ‘예술에 가격표와 평점 매기는 게 크게 잘못된 건 아닐 텐데’ ‘적당히만 따라 한다면 나름 괜찮을 지도 몰라’ ‘사람이 이기적으로 사는 게 그리도 못마땅해?’


이상적으로 보자면 예술에 서열을 매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답이 명확한 문제도 아니지 않나? 유행 따라가는 건 눈살 찌푸려지긴 하지만, 게거품 물만큼 열받는 일인가? 나도 정작 나만 챙기며 사는데, 저 사람 보고 뭐라 할 자격이 있나? 결국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곧 사라질 인생에서 이상만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의식 한 편에서 반란의 움직임이 기어오른다. 백기를 들어야겠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인정한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 그 정도는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머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분명 틀리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인정과 수용, 그리고 동화는 참으로 별개다. 머리로 부조리를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기꺼이 부조리에 동화되기란 더더욱 어렵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너무 나약해서, 추위를 애써 무시하고 어린애처럼 때만 쓰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벌거숭이인 채로 살 거 같다. 이 삶에 의구심이 매번 들지만, 어떡하나. 이 인생뿐인 걸.


세상은 차갑다는 사실은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다. 다 알고 있었는데, 다 인정했는데, 왜 차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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