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불안을 잠재우는 묘약
우리 가족에게 제철 음식을 먹으며 사는 건 일상이었기에 나에게도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제철 음식을 먹는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된 건 일 때문에 혼자 타지에 살게 되면서 내 삶에 불안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불안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고, 그 전의 나도 불안을 모르고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것이 내 삶을 흔들어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 했었다.
그때의 나는 어딘가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몸을 전부 맡긴 채 살기에는 천성이 그렇지 못해서 그저 두 발은 바닥에 꼭 붙인 채로 몸만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차라리 몸을 맡기면 편할 텐데 그 힘겨운 물살을 버텨내려 너무 애썼나 싶지만 지금 생각하면 기를 쓰고 버틴 덕에 떠내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두 발 붙이고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 중 하나가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으려면 딱히 나를 위해 요리를 하기보다는 한 끼 때우는 모양새가 되고는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눈 뜨면 급하게 뛰어나가기 바빴고, 점심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해결하거나 시켜 먹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후에는 아무거나 대충 먹고 잠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라 나 역시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싶었다.
여느 날처럼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집으로 향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의 퇴근길, 갑자기 따끈하고 맛있는 무언가가 먹고 싶었다. 뭐가 먹고 싶은지도 모른 채 버스에서 내려 집과 반대 방향인 마트로 향했다. 뭘 먹어야 할지도, 그래서 뭐를 사야 할지도 모르는 채 마트 안을 서성이다가 여러 가지 어묵이 들어 있는 봉지가 눈에 띄었다.
'그래, 저거다!'
편하게 어묵탕을 끓일 수 있도록 안에 국물용 수프도 있었으니 별다른 요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고명으로 얹을 파도 한 단 사고, 함께 먹을 청주도 한 병 집어 들었다. 혼자지만 그날만큼은 제대로 구색을 갖추어 먹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에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가 어묵탕을 끓이고 청주도 데웠다. 그저 다 집어넣고 끓인 어묵탕 한 그릇과 전자레인지로 데운 따끈한 청주 한 잔에 몸과 마음이 모두 녹았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어묵탕을 보면 혼자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 어묵탕을 끓여 먹던 그 밤이 생각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열심히 겨울 음식을 찾아다녔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증명이라도 받고 싶은 듯이. 그때 어묵을 사다가 뜨끈한 어묵탕을 끓이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호호 불어가며 뱅쇼를 마시고, 퇴근길에 뜨거운 호떡을 사들고 식기 전에 가려고 바삐 걸었던 기억들이 나를 살게 했다.
혼자 지내면서 신선한 제철 재료를 이용한 밥상을 차리는 건 어려웠기에 그 당시의 내가 찾은 제철 음식은 이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 어느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를 자각하는 것만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발 붙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 불안이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 말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것 말고, 현재를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가능해진다. 마음에 잔잔한 불안이 찾아온다면 딱 이때에만 할 수 있는 제철의 즐거움을 찾아보자.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를 걷고,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차가운 수박을 한 입 베어 물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누워서 끝없이 높은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뜨끈한 어묵탕 한 입에 청주 한 모금을 들이켜는 작은 행복. 앞의 문장을 쓰려고 계절의 행복을 하나씩 떠올리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겨울 최고의 행복으로 어묵탕에 청주를 꼽는 걸 보니 확실히 그때의 나를 붙잡은 건 딱 그때가 제철이었던 어묵탕과 청주 한 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