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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절기를 기록하는 일

by 헤아림


"오늘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입니다."


텔레비전 뉴스 속 기상 예보에서는 늘 절기에 대해 언급한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시절에는 모두 절기에 따라 생활했을 텐데 도시 생활을 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이 되었다. 그러다 지난여름, "입추 매직"이라는 말을 만났다. 한참 무더위가 계속되다가 양력 8월 7일, 갑자기 날이 조금 서늘해졌다. 가을의 기운이 일어선다는 입추가 되니 마치 마법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자 붙인 재미있는 말장난이었다. 점차 절기의 개념이 잊히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런 말장난 만으로도 몇몇 절기는 우리 삶에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절기는 태양의 주기를 따른다. 1년에 360도를 회전하는 태양의 길(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회전하지만)을 24로 나누어 각각 하나의 절기로 한다. 2월 입춘을 시작으로 한 계절에 6개, 한 달에 2개의 절기를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약 보름 정도가 한 절기에 해당한다. 흔히들 절기를 시작하는 그날 단 하루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시작일부터 그다음 절기의 시작일 전까지를 하나의 절기로 본다.


내가 절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느 농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농사가 재미있어서》라는 책을 본 이후였다. 책에 따르면 절기는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알아낸 기후의 규칙성이다. 1년 농사의 주기가 절기를 따라가기에 농사력을 절기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입춘에 할 일, 우수에 할 일 등 매 절기마다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다.


사실 나는 기후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이 주기가 소용없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여전히 절기와 농사의 주기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간다고 얘기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농작물 생산에 피해를 봤다는 뉴스를 본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이게 아직도 맞는다고? 의문이 들었다. 당장 작년 가을 너무 더운 날씨 탓에 배추 농사를 망친 농가들을 이 봤다. 우리 밭에서도 배추를 심고 나서 이어지는 무더위 때문에 몇몇 모종이 자리잡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불과 2년 전에 쓰인 책인데 그 사이 상황이 많이 달라진 걸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책을 더 읽어 내려가며 찾을 수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기후 변화는 엄청난 계절의 전복이 아니라 예상치 못하게 큰 비가 온다던지, 예상치 못하게 무더위가 길어지는 등의 상황이라 얘기한다. 계절과 절기가 발을 맞춰 잘 흐르다가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 변화가 농가에 큰 피해를 끼친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계절과 절기가 잘 맞춰 흐른다니 다행스러우면서도 언제 어떻게 입게 될지 예상할 수도 없는 농민들의 피해는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남았다.




주말 농장 개념으로 운영되던 부모님의 농사는 엄마가 퇴직하신 후 빠르게 바뀌어 갔다. 그 해 이른 봄부터 수도가 들어오고, 농막이 들어서고,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가마솥도 놓았다. 당연히 밭에서 보내시는 시간도 늘어나고 농사짓는 가짓수도 빠르게 늘어갔다. 이제는 주변에서 밭에 뭐뭐 심으셨냐 물으면 안 심은 걸 얘기하는 게 빠르다고 대답할 정도니까.


며칠 전에는 지난여름 수확해서 말려두었던 곤드레를 넣어 곤드레밥을 지어먹었다. 사진을 보고 무슨 맛인지 알아서 더 괴롭다던 친구가 있었다. 올여름에 놀러 오면 생 곤드레로 곤드레밥 지어먹자 했더니 그제야 곤드레도 키운 거였냐며 놀란다. 나에게는 당장 눈앞에 있는 맛있는 곤드레밥이 자랑할 일이지 그 곤드레를 키운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자랑할 생각도 못했다. 계절에 맞춰 여러 채소를 심고 잘 키워서 수확하고 먹는 것은 우리 가족의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라 특별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주변 친구들이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해 줬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 친구들은 우리 집에서 사 먹는 채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때마다 여전히 놀라워한다. 그래서 이 시간들을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기록해 보기로 했다.




농사의 주기가 절기를 따라가니 기록의 주기도 그에 맞추기로 했다. 앞으로 내 생활의 기준도 매달 14일의 ○○데이보다 한 달에 두 번 찾아오는 절기가 될 테니 일기 쓰는 마음으로 시작해 본다. 앞서 말했듯이 한 해를 시작하는 절기는 입춘(양력 2월 4일쯤)으로, 처음 계획할 땐 한 해의 절기를 고스란히 따르며 1년의 이야기를 꽉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농사에 있어 2월은 한겨울이라 그때 수확하는 채소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을 경칩(양력 3월 5일쯤)으로 미뤘다. 이때부터는 땅이 조금씩 녹아 추운 겨울을 난 나물과 채소들을 수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장이 끝난 대설(양력 12월 7일쯤)부터는 농사일도 모두 마무리되기에 먼저 수확해 논 것들로 해 먹는 얘기를 다루게 될지도 모르겠다.


게으르면서도 완벽주의를 꿈꾸는 내가 세이브 원고도 없는 실시간 연재를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들을 우리 가족의 비밀 얘기로만 두지 않고 (아무도 비밀이라고는 안 했지만) 여러 사람들과 나눌 생각에 설레는 마음도 든다. 이렇게 걱정과 설렘 모두 가득 안고 다음 주, 드디어 첫 수확을 시작한다.


매실나무에 꽃눈이 앉은 걸 보니 봄이 오고 있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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