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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이 깊어지면 학위가 생긴다?

이렇게까지 열심일 생각은 없었는데..

by 헤아림


그동안 정물로만 바라보던 식물들이 내 돌봄의 대상이 되고 나니 궁금한 것들이 넘쳐났다. 가장 기본적으로 물은 얼마에 한 번씩 주어야 하는 건지에서부터 흙과 화분은 어떤 걸 써야 하는지, 특히나 식물이 아프거나 이유도 모른 채로 죽어갈 때는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는데 대체 왜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다른 건지. 궁금증이 해결되기는커녕 답답한 마음만 커져갔다.


거실 창가를 가득 채운 화분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만났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 학위가 필요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어? 나도 입학하면 식물 성장에 대한 더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가장 가까운 과가 무엇일까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원예, 그중에서도 화훼뿐이었지만 이 모든 것에 벼농사와 축산까지 포함하는 "농학과"가 가장 가까웠다. 그래도 식물 키우는 걸 배울 수 있는 과는 여기가 유일했다. 그래서 농학과에 지원했다.


사실 나는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여러 사람이 말하는 중구난방의 정보들 속에서 "진짜"를 알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단지 그 이유로 여태껏 본 적 없는 수많은 화학 기호들과 유전자 정보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몰랐기 때문에 용감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원한 대가로 나는 채소와 과일을 키우고 온실을 짓는 공부까지 하게 됐다.


마지막 학기에 현장실습을 나가서 만난 딸기 온실


꿈에 부풀어 입학한 첫 학기는 모든 게 곤욕스러웠다. 직접 마주하지 않고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학문적으로(굳이 어려운 말로) 쓰인 모든 어려운 단어들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쌍떡잎식물은 쌍자엽식물이라고 불리고, 피자식물 현화식물은 모두 속씨식물을 부르는 말이며, 기수우상복엽, 우수우상복엽과 같은 말은 무슨 암호를 듣는 것 같았다. 원래 알던 것도 모르게 하는 수많은 어휘들 때문에 매번 농업 용어 사전*을 찾아보느라 수업 진도는 한없이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광합성의 화학반응식이 그렇게 복잡한 줄 처음 알았고(참고로 6CO₂+6H₂O+빛 에너지 → C₆H₁₂O₆+6O₂이다.) 심지어 해충방제학과 식물의학 수업을 들을 땐 온갖 벌레들의 사진을 자세히 보고 살펴야 했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공부를 하겠다고 한 건지. 매일 공부하고, 매일 후회했다.


농학을 전공하며 들었던 수업의 교재들


사실 부모님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밭을 가꿔오고 계셨다.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어릴 적 조부모님들을 도왔던 기억을 되살리고, 옆 밭 어르신의 도움을 받고, 가끔은 유튜브로 정보를 찾아가며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가고 계셨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이 등장해 쫑알쫑알 한 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바로 나였다.


꾸역꾸역 해나가는 공부였지만 그 와중에도 로운 것을 배우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배운 것들 중 부모님의 밭에 접목시킬 수 있겠다 싶은 것들을 따로 적어두었다 알려 드렸다. 양학 수업을 들은 뒤에는 지 검정을 통해 현재 우리 밭 흙의 산성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해충방제학을 들은 뒤에는 매년 옥수수를 갉아먹는 벌레가 조명나방 애벌레라는 사실을 알려 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공부한 이론을 부모님의 밭에서 (대리) 실습해보고 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견 수준에 불과한 내 얘기들이 뭐 얼마나 도움이 됐겠나 싶지만 그저 하나 거들었다는 생각에 혼자 뿌듯해했다.


이쯤이면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장화를 신고 밭을 갈고 있는 내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장학금을 받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부모님의 고민에 답을 찾아드리며 내 공부가 헛되지 않았음을 기뻐하면서도, 그리고 졸업을 할 때 까지도 내가 직접 농사를 지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끝까지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손에 직접 흙을 묻히며 농사를 짓기로 결심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농촌진흥청의 농사 관련 포털, 농사로에서 제공하는 사전 서비스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q/psqb/farmTermSimpleDicLst.ps?menuId=PS0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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