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되기
딸 넷을 낳아 기른 엄마는 엄마라기보다는 언니 같습니다.
아직 어른이 안된 엄마!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토닥여 줘야 합니다
할머니가 돼도 여전히 예쁜 울 엄마는 아직도 잘생긴 아버지와 전투를 치르십니다.
마치 러시아에게 열세인 우크라이나처럼, 엄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을 겁니다.
그 후유증 소식에 둘째 우서는 식사하며 기분을 풀어 드리자고 제안했고, 좋은 생각이라 여겨 점심 식사를 약속했습니다.
”듣기만 하자, 엄마 이야기에 훈수 두지 말고 듣기만...”
그렇게 동생에게 신신당부하고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좁게 앉아 불편함이 있었지만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을 고즈넉한 식당이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고. 엄마의 몇십 년 묵은 억울함도 나오기 시작했지요.
억울함의 그림자로 식탁이 덮어졌습니다.
또.. 옆 테이블 사람들은 이미 없는 사람들이 됐고 오래된 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 칼칼한 목소리로 명사 하나, 조사 하나 틀리지 않는 수십 년째 똑같은 말들이 쏟아집니다.
그 소리는 좁지만 유서 깊은 식당 안을 채웠습니다.
우서는 엄마의 말을 잘 들어줬고 훈수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들의 쳇바퀴를 견딜 수 없었고
온몸이 옥죄는 듯했고,
바닥에 질펀한 물이 있는 검은 상자 안에 갇힌 듯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엄마, 어제 친구들하고 있었던 일, 요즘에 운동하면서 생긴 일, 딸들하고 사위들 건강, 손주들 근황... 그런 거 얘기하면 안 돼? 그런 거 안 궁금해? 엄마, 이 말들은 내가 어른이 된 이후로도 30년째 엄마랑 눈만 마주치면 듣고, 전화 통화할 때마다 늘 하는 똑같은 얘기잖아. 엄마는 이 똑같은 얘기를 엄마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네 명 딸들에게도 말하고, 또 하고, 또 하잖아.”
"내가 엄마에게서 무엇을 취하고 싶은 게 남아 아직도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저를 데리러 왔고,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넌 그렇게 처절하게 말해야 했니? 그냥 ‘그만하세요. 다른 재미있는 얘기 해요.’ 하면 되지.”
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한번 더 생각해 봤습니다. 왜 가볍게 말하지 못했나?
아마도 내 말을 받아줄, 들어줄 엄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슴을 치며 소리 질러도, 벼락 치듯 화를 내도 내 요구의 목소리는 엄마의 과거 슬픔에 묻힙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이 가장 중요합니다.
50년 전, 젊은 부모님은 당시 신혼부부들이 겪었던 가난과 성격 차이, 고부 갈등을 전투적이고, 치열하게 겪었습니다.
젊은 신혼 시절을 검은 잉크를 뿌리며 채워 가셨지요.
물론 엄마에게 늘 듣는 말에 의하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시집살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자 같은 할머니와 하이에나 같은 고모들에게 힘없고 나약한 젊은 며느리였던 엄마는 약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 또한 그 사자들의 아들이자 하이에나의 형제였으니,
연약한 엄마의 고달픔은 그들에게 이해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엄마의 상처는 온몸 고름이 되어 분수처럼 뿜어져 사방으로 솟아 뿌려집니다.
그 가운데 조그만 씨앗이었던 나는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어린 생명의 희망을 품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시간의 성장통을 겪습니다.
저 또한 성장통으로 아픔을 이겨내며 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성장통은 죽을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전투 속에서 보이지 않는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아이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슬픔의 우물에 빠지면 다른 풍경은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잘생기고 예쁜 젊은 부부에게서 나는 나무를 품은 작은 싹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눈과 귀는 상처의 고름으로 막혀 있었고,
네 딸들의 부르짖음들은 듣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어요.
쓰라린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그녀의 첫째 딸은 세 동생의 맏언니로서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도움을 요청해도 들리지 않는 엄마에게 첫째 딸은 언제나 다 큰 아이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잘 해내야만 했습니다.
사람은 슬픔에 갇히면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자신의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성찰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첫아기를 낳은 후 왼쪽 골반이 삐뚤어져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친정 엄마가 오셔서 병원을 함께 갔어요. 얼마나 든든하던지요.
진료실로 엄마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엄마는 당신의 아픈 곳을 상담받느라 큰딸의 상태를 의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배려 없음과 공감의 부재는 사람의 감정에서 외로움을 꺼내 쓰게 합니다.
나에게는 왼쪽 발에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9개월, 아기 때
혼자 낮잠을 자던 나는 깨어나 울면서 엄마를 찾아 문 쪽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50년 전 집은 부엌의 아궁이가 안방보다 낮게 위치해 아기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뜨거운 냄비나 솥단지에 빠질 위험이 있는 구조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뜨겁게 끓고 있는 밥 물에 다리를 빠뜨렸습니다.
그 사고로 엄마는 병원에 뛰어갔고, 몇 주 동안 왼쪽 다리 하나를 온전히 덴 아기를 수발하며, 아빠의 원망 가득한 독설을 들어야 했지요.
“네 성질이 못돼서 그랬어.”
뭐든 내 잘못이겠지만요.
"그땐 나도 잘 몰랐단다."해 주시면 감정의 오해가 없을 것을..
나도 육아를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9개월 아기는 위험에 노출되기 쉬워 부모의 보살핌이 더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요.
나는 양말을 신을 때마다 “애구 애 구구~ 많이 아팠을 아가... ”
“얼마나 아팠니! 아가야..”라고 스스로 위로를 합니다.
엄마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아직 부족한 나의 성찰은 울분이 되어 목구멍에서 뜨거운 눈물로 쏟아져 나옵니다.
이 울분이 분수처럼 날아올라 내 아이들에게 닿지 않도록 내가 멈춰야겠지요.
내 남편은 말합니다.
“너는 네 왕국을 새로 건국한 거야. 새롭게!”
새로 건국한 나라에는 구시대의 슬픔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해 내야 할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