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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박사와 할매손 두부.

by 김석철 Feb 26. 2025


  

       백태는 된장이 되고, 두부가 된다.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애미의 간절함을 닮은 간수잽이의 첫 시간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새벽 두 시.
간수잡이 고 기사는 어김없이 첫 물을 대접에 받아 정성스럽게 올려놓았다. 콩과의 조우를 시작한 것이다.
 충분히 불려놓은 백태가 큼지막한 스팀솥 안에서 흐물어질 때까지도 간수잽이의 고졸한 의식은 이어졌다.

 허구헌날 술기운이 가시지 않는 고 기사는 간수잽이로서는 재야의 숨은 고수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알딸딸한 술기운이 돌아야 비로소 제정신이 되는 술꾼인 고 기사는 근태가 엉망이라 모습을 드러내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지만, 간수잽이로서의 탁월한 실력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쓴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얼떨결에 공장장의 직함을 떠안은 나에게 고 기사의 근태는 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최고의 불안 요소였다. 간수잽이의 주걱질에 따라 두부의 수율이 요동을 치고, 최악의 경우 두부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니 간수잽이는 갑 중의 갑으로 군림했다.
 초뺑이 고 기사는 간수 치는 빼어난 실력 하나로 업계에서 '고 박사'로 통하며 무소불위의 패악을 부려댔다.
 
  비상시, 수율은 크게 떨어질 망정 최소한의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급한 대로 대체인력을 심어야 하는데, 고 박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간수잽이 주걱만큼은 넘기지를 않았다. 어깨너머 눈 흘김 조차 용인하지 않겠다고 돌아서서 은밀히 간수를 잡았다. 근태가 엉망이면 대체인력이라도 대비가 되어야 하는데... 행여 기술자 '곤조'라도 부릴까 봐 전전긍긍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나날이 아슬하게 이어졌다.

 비지와 분리된 뜨거운 콩물이 간수잽이의 손길을 기다렸다. 수율과 맛, 탄력성을 단 한 번의 간수질로 살려내야 한다. 간수의 양과 키만 한 대형주걱의 손놀림에 따라 딱딱하고 텁텁한 맛이 나는 상품성 없는 하급 두부가 만들어지거나, 아예 콩물 전체를 버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퇴로는 없었다.
 콩물과 주걱이 일으키는 파동 속에서 몽글몽글 잘게 뭉쳐진 뭉게구름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실전의 긴장된 순간, 간수와 콩물의 어울림이 두부를 뭉쳐내기 시작한 것이다. 수율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두부틀로 잽싸게 옮겨진 순두부 위로 육중한 압축 기계의 힘이 가해지자 두부틀을 감쌌던 광목 사이로 울컥울컥 뜨거운 물이 토해졌다.

 집요하게 고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았다. 사소한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고 쫒았다. 의도적으로 가리던 고 박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가 소홀해졌는지 굳이 숨기려고도 않았다.
 필요한 간수의 양은 교반 하는 통의 크기에 따라 비율 계산을 하면 어느 정도 데이터가 나왔지만, 간수와 콩물을 휘저어 뭉치게 만드는 감각은 훔쳐보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소량이야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대용량 통 속에서 대형 주걱 하나로 고르게 응결을 시키는 손놀림은 실전을 통하지 않으면 체득이 어려웠다.
 농도는 다르지만 궁여지책으로 콩물 대신 물을 채워 연습을 시작했다.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결을 따라 섬세하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고 박사의 움직임을 복기했다.
문제는, 실제 콩물과 간수가 어우러지며 응결이 되는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였다.
막막했지만, 고 박사의 근태로 미뤄봐서 비상 상황을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 아니면 안 돼하는 기술자의 오만이 고 박사 자신의 가치를 갏아먹었다. 대체 기사를 키우지 않는 이유 역시, 당일 생산, 당일 출하를 하는 손두부 공장의 특성상 자신의 몸값을 지키는 최상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고 박사의 무단결근이 현실이 되던 날, 대책 없는 현장 직원들과 곧 들이닥칠 배송 기사와 유통업자들, 시장통이나 마트에서 장사를 해야 할 상인들이 고 박사 한 명으로 인해 줄초상이 날 난감한 상황에 놓여버렸다.
 권한이나 권력이 집중되고 고이면 그에 따른 폐해는 반드시  선의의 삼자를 희생시키기 마련이다.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딱히 달리 방안도 없었다. 간수잽이 없는 두부공장의 가동, 모 아니면 도였다.

 보일러가 점화되고 불을 뿜는다. 밤새 불려 둔 백태콩이 스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뜨거운 김을 연신 쏟아냈다. 맷돌 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삶긴 콩들을 사정없이 으깨고 농도 짙은 콩물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걸쭉한 콩물은 다시 원심분리기를 거치면서 콩비지와 순수 콩물로 나누어진다.
드디어 간수잡이의 시간이 되었다.

 고 박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드러낸 시간은 한바탕 법석을 치른 공장의 문이 닫히고, 결산 마감을 막 끝 낸 싯점이었다. 몸에 찌든 알콜 냄새를 풍기면서 굳이 사무실을 찾은 이유는 자명했다.
 "아이고, 두부 수율이 이기 머꼬? 이래가 밥값이나 빠지겠나."
 비아냥대는 면상에 쌍욕을 꽂아버렸다. 밤새 짊어졌던 긴장과 중압감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일순 폭발을 하고 말았다.
 쭈뼛거리며 꽁무니를 빼는 고 박사의 뒤통수에 대고, 그딴 식으로 엿 먹이려면 간수 주걱에서 손 떼라고 악을 질렀다.
 오만상을 쓰던 사장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갑을이 역전된 순간이었다.

 철옹성 간수잽이의 권력에 뻑큐를 날린 오지게 통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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