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눈빛에 마음이 움직일 때
스무 살 무렵부터 내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서, 내가 따뜻하게 변하는 게 꿈이에요.”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해놓고, 정작
‘따뜻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쉽나 뭐?’
싶은 마음도 늘 있었다.
그럼에도 그 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문제는 상대에게서만 그 따뜻함을 기대했다는 점이었다.
받기만을 바랐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쉽게 안달이 났다.
욕심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쩌면 내가 나를 조금 내려놓아서일까.
사람들의 마음이 보인다.
나처럼 사랑받고 싶어 하고, 힘들어하는 마음.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기도 어려워, 버티고 버티는 존재들이.
그런 이들에게 다정한 눈길을 건네고,
몇 마디 따스한 말을 건넸을 뿐인데,
행복해하는 얼굴을 마주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2018년 혹독한 겨울에 뉴욕의 거리에서
하루동안 척박함과 온화함을 극명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영하 12도의 매서운 바람 속,
비싼 땅덩이 위에서 갈 곳을 잃은 노숙자들은
길바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철없던 나는
‘이렇게 추운 도시에 왜 굳이 버티고 있을까.
좀 더 따뜻한 나라로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칼 같은 바람만큼이나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로
내게 유일하게 다정한 시선을 건넸던 한 아주머니의 눈빛.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외로웠던 만큼 더 크게 다가온 따뜻함이었다.
그 눈빛이 좋았다.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시선.
이건 종류의 다정함은, 사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카페보다는 시장에서,
북부보단 남부에서,
도심보다는 시골에서,
젊은이보다는 한 시절을 향유했던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이 더 높다.
(결국은 사람으로 가득 찬 곳보다는 소중함을 알아주는 곳이 더 고마운 장소더라.)
인생의 한 치 앞이 안 보였던 20대의 나는,
그런 시선들조차 고마운 줄 몰랐다.
왜 더 주지 않느냐고 생떼를 부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얼마나 나에게 많은 따스함이 왔던 건지 헤아릴 수도 없다.
나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내 다정함도 기꺼이 내어주고 싶다.
매일 걷는 길에서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카페에서도,
너무 익숙해져서 가끔 소중함을 놓치는 관계 속에서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빛을 띤다.
억울한 감정으로 나를 가득 채우면,
세상의 말과 표정은 날카로운 창과 방패가 되고,
‘세상은 역시 아름답다’는 믿음으로 바라보면,
모난 말마저도 그럴 사정이 있겠지 하는 여유가 생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결국은 승자다.
자기만의 세계를, 지독할 정도로 단단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타인에게 건네는 다정함은
그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 준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다시 꿈을 꾼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는 세상 물정에 밝은 것도 아니고,
남들이 말하는 ‘조건’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다정함'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안다.
그 힘이 나를 변화시켰고,
더 나은 사람으로 되고 싶게끔 만들어주었다.
예전에는 따뜻한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 수많은 인연들이
나를 따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내가 건네는 다정함이
내 주변을 밝히고,
그리고 언젠가,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도 닿기를.
(예전에 어떤 모임에서 내가 ‘다정함’을 이야기했더니
누군가 물었다.
"그런 감정을 선동하는 거예요?"
나는 웃었다.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런 말과는 별개로,
사람은 결국
밝고 따뜻한 기운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나는 지금도 그 가치를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엔 불나방처럼
빛이 보이면 무작정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 빛이 어떤 빛인지,
나와 맞는 빛인지
조금 더 분별할 줄 알게 됐다.
계속해서 따스함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