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도 가끔 목이 아파 웁니다

알뜰폰, 멘탈 비상사태

by 홍고롱


욕심을 덜어내고 있다고 그렇게 써댔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태국 갈 준비에 한창인데, 현실도 살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이랄까.


내가 없어도 원활하게 내 주변이 돌아갔으면 좋겠고,

여행 가서 큰 사건, 사고가 없었으면 좋겠고,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덜 섭섭했으면 좋겠고.


...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놓쳤다.

나는 바보다.
그것도 고집 세고 깐깐한 똥멍청이 바보.




알뜰요금제 유목민이라면 다 알 거다.
한 요금제에 정착해서 평생 저렴하게 쓰는 일은 없다는 걸.
보통 4개월에서 12개월. 그쯤이면 이별이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요금제의 파도를 타기로 했다.
나름 비교도 해보고, 이거다 싶어 선택했지.
기분 좋게 유심도 배송받았다.

그런데 개통이 안 된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아니, SKT 너는 왜 그랬니.

개인정보 유출 이슈가 나랑 무슨 상관이람 싶었는데,

그 덕에 개통 신청자가 폭주했고,
홈페이지는 숨을 쉬지 못했고,
고객센터는 나를 외면했고,
나는 그냥 망했다.




사실 나는 조금 둔감한 편이다.

보이스피싱 문자 링크를 클릭해 놓고도 "전부 바꿔야 하나?" 고민할 정도.

지인들에게 뭇매 맞은 전적도 있다. '설마 나까지 오겠어?' 하는 안일함 때문에.


그간 여행에서는 큰 사고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점점 '에이 괜찮겠지'라는 마인드가 강해졌다.

그 덕에 엄마의 속은 문드러졌다.


방콕 간다는 말에 엄마는 며칠째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니가 가서 죽든 말든, 난 이제 신경 안 쓸 거야.”

"방콕은 위험하다, 한국인 금지된 곳도 많다."며,

나를 놀래키려는 공포 마케팅을 펼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는 유튜브 콘텐츠는 정치, 범죄, 우주, 동물.

그녀가 우리 집 와서 TV 한 번 보고 가면

내 알고리즘은 바로 정치+범죄 미스터리 다큐 유니버스.

심지어 가장 싫다던 정치인 뉴스만 보고 있어서

"엄마, 그 정도면 사랑이야. 얼굴 외우겠다" 했다가 나를 째려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청개구리 딸을 잘 아는 그녀는 결국 포기 상태.

그래도 나는 연락도 자주 하고, 위치 전송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이 없네.




본론으로 돌아가자. 알뜰요금제를 변경하려고 신청했고, 유심도 배송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개통이 안 되는 것이다.


로그인? 안 됨.

문의? 닫힘.

전화? 묵묵부답.


'셀프개통'이라고 적어놨지만, 이건 뭐, '셀프'도 아니고 '개통'도 아닌 상태.

몇 십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분노에 찬 나는 유심을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어디 갔니… 얘야…)


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게 안 되면 저걸 하면 되지!”
그렇게 두 번째 요금제를 신청했고,
2시간 만에 유심이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엔
직접 개통이 안 되는 요금제란다.

아니… 그럼 나는 도대체 뭘 해야 하냐고요.


하루, 이틀, 사흘을 기다렸다. 하지만 연휴는 다가오고, 나는 곧 출국이다.

이러다 아예 전화가 안 된 채로 출국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래서 계속 연락하며, 고객센터에 항의 글도 남겼다.
“지금 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시나요?”
(SKT의 여파는 여기까지도 미쳤는지 여기도 무응답이다.)


그리고 오늘.

글을 쓰러 외출하려던 찰나, 처음 신청했던 통신사에서 카톡이 왔다.

"셀프 개통을 안 하셔서 임의로 개통했습니다."


네? 그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오늘 오후 4시, 갑자기 통신이 ‘뚝’ 끊겼다.


예고도, 절차도 없었다. 배려는 더더욱 없었다.




받아야 할 급한 전화도 없고, 연락처를 따로 챙겨야 할 일도 없지만,

인터넷이 끊긴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공포를 느꼈다.


현대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 중 하나라지 않나.

휴대폰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앱 사용내역이 노출되는 상황.

나는 1번이었다. 갈 곳도, 방법도 몰랐다.

나는 아주 훌륭한 통신계 미아가 되었다.


결국 직접 나섰다.

통신사 매장만 다섯 군데를 돌았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직원 한 분이 안쓰럽다는 듯 상황을 정리해 줬다.

“그냥 자동 개통된 걸로 유심만 끼우시고 쓰세요.
정식 변경은 다음 주 수요일쯤 가능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때 나는 이미 한국에 없다.


막막했고 허탈했다.

디지털 디톡스를 자처해야 하나, 집순이로 살아야 하나

그 강박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가 답답해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혹시 올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뿐.

그 외엔 담담하게 즐기기.


친구에게는 약속 시간, 장소, 상황만 알려주면 된다.

조금 불편하면 되는 거다.


긍정의 아이콘도 때론 긍정이 안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슬퍼하고, 인내하고, 체념하면 된다.


조금 더 내려놔야 할 때가 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를, 유하게 받아들일 기회.


사실, 주변에만 알린다면 큰 일은 잘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방콕 어딘가에서 "개통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자가 올지도 모른다.

안 오면 어떤가. E심으로 보이스톡 하면 되고, 돌아와서 연락하면 되지.


정말, 인생은 재밌다. 어떻게 펼쳐질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은 당해봐야 그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보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고, 지나간 후에야 경험치가 쌓인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 배웠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오늘 쓰려던 주제는 내일 미리 써 놓아야겠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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