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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7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우리 주변에서 우물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농촌에서도 우물 대신 지하수 펌프가 대신하니까요.

 제가 어릴 적 집 가까이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우물은 이름까지 있는 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세계적 육종학자이신 우장춘 박사가 그의 어머니를 기려서 파게 된 우물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곳 일본까지 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우물을 만들고 우물 이름을 우장춘박사는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지었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매일 이 우물에서 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려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시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수박을 매달아 우물 속에 넣어 두었다가 차가워지면 꺼내어 먹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윤동주 시인은 당시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15살이 될 때까지 그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집 뒤에는 물맛 좋은 수십 길의 우물이 있어서 물을 길어 오디를 따먹어 시퍼레진 입을 씻기도 하고 또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고 합니다.(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     

 이 ‘자화상’은 시인이 23세 되던 1939년에 쓴 시입니다. 그전 해에 시인은 용정을 떠나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그때까지의 습작기를 거친 후, 그의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입니다.     

 그는 홀로 아무도 없는 외딴 우물을 찾아가 우물을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엔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는 누구입니까. 물론 시인의 현재 얼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론가들의 일반적 시 해석을 잠시 읽어 보고 이 시를 감상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물 속에 한 사나이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과거의 아름다운 고향에 그대로 남아있는 자아란 뜻이므로 곧 본질적 자아를 의미한다.”(1)

  이렇게 여기 우물 속에 보이는 얼굴이 현제의 시인의 모습이 아닌 과거 어릴 적 모습, 즉 아름다운 유년의 삶 속에서 가졌던 어떤 의식이나 생각들(본질적 자아)의 모습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소위 이러한 ‘본질적 자아’와 시인이 성장 후 가지게 된 ‘현실적 자아’와의 갈등으로 이 시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둘째 연에서 ‘우물 속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대목을 시인의 때 묻지 않은 어릴 적 그를 상정한 것으로 이들 평론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 구름, 하늘. 그리고 바람과 가을은 바로 지금 시인이 우물 속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 표현은 말하자면, 화가가 정물화 그림을 그릴 때 그 배경을 그린 것과 같은 것으로 단순하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에 예로 든 이러한 어려운 해석은 근본적으로 이 시의 제목이 ‘자화상’ 임을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화상은 그냥 지금의 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다음 절에서 지금 자기의 모습이 ‘어쩐지 미워져’ 돌아간다고 합니다. 위에서 지금 우물에 비취는 모습이 위 평론가의 말대로 이전의 순수했던 ‘본질적 자아’라면 이를 미워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시는 근본적으로는 시인이 몇 년 후에 쓴 ‘서시’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한 점 부끄럼 없기’로 살고 싶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살면서 부닥치는 여러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 이런 것을 생각하며 우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괴로워하며 돌아가지만, 가다가 생각하니 자신의 지금 모습이 가엾은 생각이 들어 다시 가 봅니다. 가서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미워져 돌아가다 그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이것은 지금 자기의 모습이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뭔가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는, 즉 그가 현제의 자기 모습에 회의도 하고 갈등도 하지만 동시에 수긍도 하는, 순수한 한 청년의 고뇌를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우물 속엔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또 대부분 평론가들은 ‘추억’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두고 이 우물 속의 ‘사나이’는 지금의 시인이 아니라 과거 어릴 적 아름다운 시절의 시인을 표상한다고 단정합니다. 거기다 이 ‘추억’이 시 본문에서 유일하게 한자로 쓰인 것을 지적하면서 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오늘, 이 순간도 내일이면 과거가 됩니다.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시인이 오늘 와서 본 나의 모습이지만 결국 내일이 되면 오늘 본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 가을 그리고 이 사나이의 모습도 다 추억이 되고 만다는 그런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연은 시인이 우물을 떠난 후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그런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가 남긴 시는 많지 않습니다. 그의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의 화자와 시인 윤동주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는 그가 산 그 짧은 시간에 쓴 일기와도 같다고 보는 평자도 있습니다. 이 시도 시인의 어느 날 하루의 일기 같은 그런 시로 읽어 보면 더욱 우리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1. 이남호. 윤동주 시의 이해. 고려대학 출판부 2014.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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