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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by 이종준 Mar 06. 2024

  2008년, 우아한 귀농歸農을 꿈꾸며 호기롭게 도전했던 귀농학교 체험을 사흘도 못 채우고 도망치던 길이었다. 밭일과 논일, 과수원 일.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던 도시민에게 생계형 농업은 상상치 못한 노동의 매운맛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다 잘 때,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일 때, 몰래 도망하리라 했는데 웬걸? 귀농학교 교문 앞에서 산책 중이던 교장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어?”

 “어!”

 둘 다 어색한 멈칫거림...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교장선생님이었다.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조심히 잘 가라며 내 손을 잡았다. 거친 손, 편안한 미소! 얼굴이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못하고 머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드리고는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에이! 쪽팔려.’ 

 여름이라도 산골 새벽길은 서늘했다. 저 멀리 시커멓게 형체만 보이는 검은 산. 그 밑으로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어둡고 딱딱한 아스팔트 길. 위험을 알리는 노란 선線. 끊어질 듯 이어진 선. 그 위를 따라 걸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이미 지쳐있지만 쉬지 않았다. 앞만 바라보며 걷고 또 걸었다. 차바퀴에 짓눌려 터져 죽은 뱀을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차 소리가 들리면 도로 바깥으로, 소리가 멀어지면 다시 도로 안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도로道路 도로徒勞, 왔다 갔다, 지그재그.


 오우정五友亭! 

 마을 입구, 잘 생긴 정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세 시간 넘게 쉬지 않고 걸었나 보다. 거창군 주상면 완수대 마을. 아버지 대代, 다섯 형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1938년에 그 자손들이 세웠다. 시대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동기간 깊은 정情이 부러웠다. 폴짝 뛰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담. 담 밖에서 외관만 구경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맞은편, 길 건너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각 성냥갑처럼 생긴 정류장... 쉬지 않고 걸어온 다리가 쉴 자리였다.

 ‘한 달이나 이야기하고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지?’ 

 나는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었다. 터덜터덜, 버스정류장 돌 의자에 짐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마을을 보니, 시골집 굴뚝마다 밥 짓는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뜸을 들이는지, 아침밥 냄새가 고슬고슬 날아왔다. 밥 냄새와 함께 소 울음소리도 들렸다. 

 음~머~, 음~머~억. 

 어린 시절, 추억 속 외갓집 동네와 다를 바 없는 아침 풍경이 정겨웠지만 고민에 빠졌다. 

 ‘어디로 갈까?’ 


 녹색 이끼가 이슬에 젖은 낡은 블록 담. 그 사이 골목길에 촌로村老 한 분이 나타났다. 속이 살짝 비치는 새하얀 모시, 미색 중절모, 반짝반짝 검은 구두, 한 손에 부채,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쭈뼛대며 일어섰다. 노장老長은 내 앞을 말없이 지나 정류장 오른쪽 끝에 섰다. 

 ‘오늘이 장날인가?’

 어르신은 자리를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고, 손으로 바닥을 쓸고 난 뒤에야 앉으셨다. 나는 반대편 끝에 다시 맥 놓고 늘어졌다. 

 음~머~, 음~머~, 음~머~억. 

 소 울음소리는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옆집 담을 타고 동산까지 이어져 대숲을 흔들었다.

 ‘버스를 탈까? 그냥 걸을까?’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머리를 번쩍 들며 배낭을 꽉 끌어안았다. 깜빡, 아주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멍했다. 몸과 시름이 같이 졸았나 보다. 버스가 오기 전에 결정해야 할 고민도 잊고 있었다.


 “어디?”

 선문답禪問答처럼 앞 뒤 다 잘라먹은 딱 한마디! 그게 다였다. 억양의 고음이 뒤쪽에 있는 전형적인 말씨. 다행히 아버지 고향이 근처인 합천이라 나는 그런 말투에 익숙했다.

 “읍내 가려고요.”

 “그랴! 날 더운데 괜히 싸돌아 다니지 말고... ”

 무심한 척, 앞만 바라보고 있던 노장의 느닷없는 일갈一喝 덕에 버스 타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 잠시 동안에 해는 조금 더 높아졌고 마을의 연기는 옅어졌다. 하지만 소 울음소리는 더 길어졌다. 

 음~머~, 음~머~, 음~머~억. 

 조심조심 담벼락을 짚으며 역시 입성을 차린 할머니 두 분이 나오셨다. 길 건너와서 노장께 인사를 챙긴다.

 “장에 가십니까!”

 노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분 할머니는 노장 앞을 다소곳이 지나친다. 할머니들도 앉을자리를 살피고, 나를 아래위로 찬찬히 살피며 자리 잡고 앉았다. 

 어느 여름날 아침, 흰색 페인트 버스정류장 안에, 노장, 그 옆 동무 사이 할머니 둘, 끝에 나까지 어색하게 앞만 쳐다보고 있다. 가족사진 찍는 것처럼 앞만, 오우정만 보고 앉았다. 

 맴~ 맴~ 맴~ 맴~ 매~엠. 

 조금 전까지 없던 매미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터졌다. 시원한 아침 바람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녹색 나뭇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침 햇살. 오우정 뒤, 녹음綠陰 짙푸른 산과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어울려 좋았다. 그저 좋았다. 


 정물靜物이 된 이 그림을 조용히 흔든 사람은 할머니들이었다. 

 “아~ 소가 저치름 배고프다고 시벽부터 울어 샀구먼... 앞 실 양반은 소여 물도 안 주고... 지 배때지만 채우면 단감.”

 “글시 내 말이. 앞 실 양반 못 쓰겠네... 여즉 퍼질러 디비 자고 있는 게비구만.”

어쩐지 소 울음소리가 좀 다르다 했더니... 밥 달라는 소리였구나. 할머니들은 배고파 울고 있는 소 이야기를 하면서 게으른 소 주인을 나무랐다. 난 뜨끔했고, 최고참 어르신은 여전히 옅은 미소만 머금고 앞만 보고 있다. 

 버스가 오고, 어르신이 타고, 할머니들이 타고, 내가 버스에 탈 때까지 주인이 게으른, 배고픈 소는 계속 울었다. 버스 창가 햇볕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어르신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를 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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