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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댈 수 있는 가족이 필요했다.

by yeon

가족이란 단어가 그전까진 그저 혈육정도의 의미였다. 어릴 때부터 해체되어 있던 가족이었고 없느니만 못한 존재일 때도 있었다. 가슴 한켠 응어리 진 진하게 농축된 감정의 원인. 나에겐 아빠도 있고 동생도 있지만 친구들 보다도 연락을 덜 하게 되는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그 정도의 관계였다. 그렇다고 가족이 그립다던지 보고 싶다던지의 감정 따윈 없었다. 그저 동생을 생각하면 한창 어린 나이에 엄마손에 자리지 못해 약간의 안타까움이 있었고 아빠는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던지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살 때보다 되려 이혼 후엔 싸우는 모습을 안 봐도 되니 심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다.

내가 아팠을 땐 엄마가 있었고 그 외 집안에 아주 큰 일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가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크게 없었다. 엄마라는 울타리가 크게 나를 지탱해지고 있어서 그랬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쓰러진 후 가족이 필요해졌다. 대구에 있는 엄마를 서울로 모셔 오기 위해 있는 연차를 다 소진해 무급 연차까지 쓰면서 대학병원 10군데를 돌아다닐 때 한두 군데만이라도 나 대신 가줄 가족. 간병을 하다 안경테가 부러져 밴드로 돌돌 말아 쓰고 다닐 때 안경 맞추러 다녀오는 동안만 엄마를 봐줄 가족, 우울증 약이 떨어져 몹쓸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때 병원 가서 약을 타올 동안만이라도 엄마를 봐줄 가족이 말이다. 내 몸은 한 개뿐인데 엄마를 돌보기도 해야 했고 이후 병원도 알아봐야 했으며 보험사 청구도 진행하고 발병 개월수에 따라 신청해야 할 것들까지 신경 써야 했기에 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사람이 간절했다.


정서적인 부분에서도 가족의 부재가 느껴졌다. 큰 결정이든 사소한 결정이든 나 혼자 오롯이 알아보고 선택해야 했는데 그 선택이 엄마의 상태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책임감과 압박감도 심했다. 그 짐을 같이 들어줄 가족. 이건 가족이 아닌 이상에야 타인은 나눠가질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나 혼자 엄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전쟁터에 서있는 것 같았다. 같이 공감하고 고민해 주고 엄마의 호전에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가족. 나이 들수록 가족뿐이라는데 그 말이 절실히 와닿았다. 이혼한 지 오래된 아빠에게 그런 역할을 줄 순 없었다. 동생과는 이미 사이가 반쯤 틀어졌고 틀어지지 않았다 한들 도와줬을 것 같진 않았다.


주 보호자 외에 다른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병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족들과 의논해 본 뒤 결정하겠다는 다른 보호자들의 말에 부러워 괜한 시샘도 났었다. 난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를 짊어진 채 홀로 서 있었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은 있었다. 남자친구와 친구의 도움도 컸다. 내가 휴직하는 동안 내 일을 부담해 주는 동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타인일 뿐 가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족이 필요했던 일이 또 한 번 일이 터졌다. 한날 아침에 잠에서 눈을 떴는데 몸이 심상치 않았다. 온몸을 감싸는 근육통과 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체온을 재보니 38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병원에 코로나 확진자가 한창 나올 때였는데 나 역시 비켜가질 못했던 것이다. 일어서면 관절 마디마디가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는데 그래도 엄마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밥을 먹여야 했으며 휠체어를 밀며 재활을 다녀야 했다. 일어서면 핑핑 머리가 돌아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나 대신 엄마를 봐줄 사람이 없기에 내가 해야 하니깐..

첫 신속항원 검사에서는 음성이 나와 감기약과 해열제를 처방받았다. 해열제를 먹으니 땀이 미친 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후 열은 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간병인을 다시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병원에서도 코로나 확진자 증가로 병동을 폐쇄하느냐로 어수선해졌다. 이미 폐쇄 병실은 포화 상태였고 확진 후 퇴원처리 되는 환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쯤 전체 코로나 검사가 이루어졌다. pcr 검사로 진행했는데 나는 양성 엄마는 양성과 음성 사이에 있다고 대기상태로 있다가 뜬금없이 밤에 퇴원하라는 통보를 받게 됐다. 그때가 밤 10시쯤이었던 것 같다.


간호사들이 엄마 먹을 약과 아침에 맞는 인슐린 주사기와 주사침등을 챙겨주며 주사 놓는 법을 알려줬다. 해열제로 열은 좀 내려갔지만 근육통이 남아 있어 힘들었지만 간호사가 하는 말들을 잘 들어야 했다. 집으로 가면 간호사도 의사도 없다. 내가 간호사가 되어야 했고 내가 의사가 되어야 했다. 내 몸이 아파도 쓰러질 것 같은 통증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도 교대를 해주거나 내 짐을 덜어줄 가족은 없었다. 몇 가지 짐을 싸고 안내를 사항을 받으니 밤 12시가 되었다. 그 밤에 사설구급차를 타고 몇 개월 비워뒀던 엄마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청소도 안 한 지 좀 지나 먼지가 꽤나 쌓여있었고 냉장고에는 정말 그야말로 텅텅 비어있어 당장 내일 아침밥 먹을 것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엄마는 양성도 음성도 아닌 상태, 차라리 같이 코로나라면 격리기간을 함께 보내면 될 일이지만 내일 나올 결과가 음성일 경우 엄마와 분리가 되어야 하는데 집에서 봐줄 사람이, 가족이 없었다. 모든 게 막막해 엄마를 눕혀두고 멍하니 주변만 둘러봤다. 한숨만 나오는데 엄마가 갑자기 웃었다.


"야반도주하는 거 같아"


나도 실소가 나왔다. 맞네 엄마 야반도주네.


엄마가 웃는 걸 본 게 얼마만이더라.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나와 엄마가 웃었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오게 된 이 일이 나에겐 생각을 바꾸게 된 작은 계기가 되었다.



문장력이 좋지도 그렇다고 재미있게 글을 쓰지도 못하지만 언제나 라이킷 해주시고 구독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요 몇 주 동안 유독 이런저런 일들로 연재일에 쫓겨 글을 너무 급하게 써서 올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 분입니다.


저는 현재도 엄마를 집에서 가정간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글을 짬짬이 시간 나는 대로 써보려고 하는데 이번 달 유독 엄마의 외래와 각종 검사들 일정이 겹쳐 정말 시간이 부족해 2주간만 재정비 후 다시 연재를 시작할까 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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