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부모를 부러워할 일인가?
치매 걸린 부모님 병간호에 지친 친구로부터 조실부모한 내가 부럽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말하는 얼굴을 본 순간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몇 달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제까지 아무 일이 없이 일상의 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다음 날 아침에 심장이 멎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를 잘 몰라서 사람이 많이 모여 북적이고 잔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친구한테는 우리 집에 엄마가 죽어서 떡 하고 있으니 좀 있으면 떡을 준다고 했다는 철없던 나를 떠올리는 친척의 증언도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방바닥이 뜨거운 안방에 누워있던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얼굴에 뽀뽀하라는 말에 내키지 않았지만 내 살이 엄마의 얼굴에 닿는 순간 얼음같이 차가운 느낌에 흠칫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 4.3 사건에서 집단 학살당한 현장에 눈이 오고 시체들에 눈이 덮여있어 실종된 오빠를 찾아 나선 가족이 시체의 얼굴에 내린 눈을 손으로 치우면서 시체의 얼굴에 내린 눈이 녹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한강 작가의 소설 중 한 대목과 일치하는 기억이 되었다.
장례식 내내 슬프지 않아 억지로 ‘아이고, 아이고’ 우는 시늉을 해야 한다고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머니 상여를 따라갈 때는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짚으로 역은 머리띠를 두른 내 모습이 너무 창피해서 친구들이 이 모습을 볼까 두려웠다. 이후 3년 내내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안방 윗목에 자리한 어머니 신위에 ‘상식 (上食)’을 올렸다.
3, 4학년 무렵에 학교 갔다 오면 새엄마가 왔다고 나에게 억지로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요해도 엄마라는 말은 목구멍이 콱 막힌 것처럼 도저히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지나면 그 새엄마는 없어졌다. 이렇게 3명 정도가 새엄마라고 들어왔다 간 것 같다. 그중 마지막 새엄마는 꽤 오랫동안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엄마라고 불러 본 기억이 없다.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병명도 모르는 병에 시달리며 가장 역할은 할아버지에 부담시키고 고생 고생하다 가셨다. 유난히 더웠던 마지막 일주일은 식사도 못해서 해골 같은 아버지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보내야 했다. 5년 전 했던 상주 노릇을 그대로 반복했고 3년간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렸다.
그 무렵 자주 가던 친구집이 있었다. 친구집이지만 먼 친척이라고도 했다. 내가 가면 그 집 할머니는 엄마 없는 불쌍한 아이여서 그랬겠지만 먹을 것도 나눠주고 각별히 대해 주셨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내가 오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 한다는 눈치는 있었다. 어느 날 둘만 있었을 때에 나에게 보내는 그 차가운 눈빛이 ‘너 보기 싫으니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왔다. 그 이후에는 그 집에 더 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친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친구 아버지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유전자 덕분인지 우리 형제들은 학교에서 성적이 꽤 좋아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비가 면제되거나 거의 안 드는 학교로 진학했다. 동네 친구들은 내가 오만해서 자기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그 이후로 고향 친구들도 멀어지고 타향 친구도 사귈 수가 없었다. 외톨이가 된 것이다. 친구가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고 그 덕에 친구들보다 나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
직장에는 상조회(相助會)라는 것이 있다. 상조회의 가장 큰 역할은 회원의 경조사에 부조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부조금이 많은 것이 부모가 사망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낸 부조금을 되돌려 받을 수가 없다. 회원의 부모가 사망하면 상조회에서 부조금이 나가지만 친소관계에 따라 개인적인 부조도 하고 상가에 가기도 한다. 서로 돕는다는 상조회의 의미처럼 큰 일을 당했을 때 품앗이로 서로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우리 형제는 받을 수 없는 부조금을 30년 40년을 해온 것이다. 상조회에 낸 돈으로 적금을 들었으면 퇴직할 때 수 천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억울하지만 개인의 사정을 설명하고 상조회에서 빠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회원은 없을 것이다. 가까운 동료의 부모상에 개인적인 부조를 하지 않기도 어렵다.
내 운명의 기구함에 대한 변명 내지 위안으로 어려서부터 가진 신념이 있다. 어떤 운명이던 공평할 거라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친구들과 노느라고 시험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학생보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공부할 시간밖에 없는 나는 더 좋은 게 아닌가?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부모의 실망이 걱정되어 오히려 공부를 망치는 학생보다 성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어 부담이 없는 내가 더 좋은 게 아닌가?
귀가 순해진다는 60대를 넘어 퇴직을 하고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70대가 1년 남은 지금 조실부모한 내가 부럽다는 친구가 있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 부모님이 살아있다면 병석에 있을 확률이 높고, 병간호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형제간의 유산분쟁이나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갈등을 겪는 사람도 많다. 많은 재산을 남기고 간 부모를 둔 자식들은 거의 다 상속 재산 문제로 형제간에 법정 다툼을 하거나 형제간 갈등으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도 많다. 부모님의 유산은 축복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형제에겐 부모님의 유산이 없다.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형제들이 어렸을 때 없어졌다. 요양원을 전전하며 형제간 분란을 야기하는 생존 부모도 없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부러운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과거로 돌아가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너는 조실부모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는 인생을 입체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부모가 너를 위해서 이제까지 희생하고 뒷바라지한 것의 10분의 1이라도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게 별로 없다. 그러므로 값을 빚도 없는 것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가? 자기가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조실부모하여 과거에 이 때문에 고생했던 나를 부러워하는 것은 세상을 한쪽만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