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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사고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

by 탄주




비행기 사고로 179명이 죽었다. 전 국민이 일주일간 애도 기간을 가지고 슬퍼했다. 누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죽은 사람은 아니다. 이들은 아마도 5분 이내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오래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남은 사람들이다. 누구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기대수명만큼 살고 양로원이나 노인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점점 기력이 떨어져 화장실도 자력으로 가기 힘들 때 요양 보호사나 자녀의 도움으로 대소변을 보다가 폐렴으로 호흡이 힘들어지면 목에 구멍을 내고 외부 장치에 의해 생명이 연장되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죽는 것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보다 행복한 죽음인가?

요양병원에도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사람은 요양병원 이후의 삶은 짧은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성공하여 아들이 효성이 가득한 부장판사로 만든 할머니를 요양병원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다른 할머니는 요양사가 하루에 몇 시간 와서 돌보는데 이 할머니에게는 전용 요양사가 붙어서 수족처럼 시중을 들었다. 바쁜 아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어머니를 면회 왔다. 덕분에 이 할머니는 3년째 대소변을 받아 내는 생활을 하는 중이다. 치매인지는 모르겠다.

이 할머니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덕분에 노년에 길게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효성이 부족한 가난한 아들을 둔 할머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 할머니를 모두 부러워했다. 그러나 과연 누가 더 고통이 덜한 죽음을 맞이하는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비참한 죽음이 아니다. 부자 아들을 만나서 불편한 생을 현대의학의 힘으로 기약 없이 이어가는 것이 더 비참한 것은 아닌가?

이슬람 국가(IS) 대원들은 반대 세력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총살하는 장면이나 산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을 촬영하여 공개한다. 두건을 쓰고 머리가 잘리는 사람과 그 머리를 자르는 사람 중 당신은 당연히 잘리는 사람보다 자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머리가 잘릴 때의 고통은 순간이다. 아마도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과 비슷한 시간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자른 사람은 그 행위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릴지 모른다.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것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서 일생에 도움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제주 4.3이나 광주 5.18에서 희생된 사람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은 아마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자기 인생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천벌이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업보라고 하는 것 같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는 광주에서 희생된 다양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 사건을 훌륭히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쪽만을 보는 것이다. 계엄군과 그 지휘관을 주인공으로 하여 희생된 사람과 같은 섬세함과 치밀함으로 또 다른 소설을 쓰면 비로소 완성된다고 본다. 비행기 사고로 죽으나 갑작스레 날라 온 총탄에 의해 죽으나 당사자는 생각보다 큰 고통이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은 남은 생에 커다란 장애로 남을 수 있고 이는 정작 죽은 당사자보다도 훨씬 크다.

나는 5살쯤에 죽어본 적이 있다. 친구들과 물가에서 놀다가 깊은 물에 미끄러져 들어간 거다. 지금 기억에 숨쉬기가 어려웠고 숨을 쉬면 코가 몹시 매웠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우리 집 안방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동네 어른 한 분이 물 위에 떠 있던 나를 건져서 집으로 왔을 때는 숨도 맥박도 없었고 괄약근이 풀려 똥으로 바지가 범먹이 되고 배에는 물로 가득하여 엎어놓으니 배에서 물이 한없이 나왔다고 했다. 모두는 죽었는 줄 알고 안방에 뉘어 놓았더니 얼마 후 맥박과 숨이 돌아오며 살아났다고 했다. 나는 살면서 그때 그냥 죽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더 좋았을까 아니면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게 좋았을까 이 문제가 내 평생의 화두였다. 어떤 때는 나를 건져 준 동네 아저씨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늘에 명을 안다는 50대를 지나 어떤 말을 들어도 귀가 순해져서 화를 내지 않게 된다는 60대를 넘어 욕심이 나는 대로 행동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70대를 1년 남겨둔 지금 나는 결론은 이렇다.

그때 죽었으나 살아서 지금에 있으나 완전히 같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대칭적이고 민주적일 것이다 따라서 5살까지 내가 경험한 요야의 합이나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요야의 합은 완전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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