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지날 때마다

by silvergenuine

교직 2년 차에 고향으로 파견근무를 신청해서 모교에서 3년 간 근무를 하게 되었다.

시골 농부로 삼 남매를 키워내신 우리 아빠는 막내딸인 날 '우리 똥단지'라 부르며 무척이나 아끼셨고, 고향에 와서 선생을 한다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공부했던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 그늘에서 외동딸마냥 사랑받으며 포시럽게 근무를 했다.


내가 열 살 때 트럭을 장만했던 아빠는 아침마다 우리 삼 남매 등교를 시켜주셨는데, 내가 파견근무를 온 후에도 매일 아침 학교까지 출근 기사 역할을 자처하셨다.

"아침마다 우리 똥단지 태워다 주는 재미가 솔솔 난다, "

딸이 좋아 틈만 나면 애정표현을 하시는 아빠에게 입을 삐죽거리며

"이게 뭐가 재밌노? 아침마다 아빠가 다른 볼 일도 못 보고 데려다주려면 귀찮겠구마"

"한 개도 안 귀찮다. 우리 똥단지 없으면 아빠가 무슨 재미로 살겠노."

"뭘, 나 없으면 엄마하고 재밌게 살아야지! 엄마, 아빠가 둘이 잘 살아야 내가 나대로 잘 살지. 둘이 싸우지 좀 말고 엄마한테 잘하세요"

"맞다, 맞다. 그래도 아빠는 똥단지 있으니까 좋아서 그러지."

아침마다 이런 대화를 자주 주고받았다.

퇴근길엔 어릴 때처럼 걸어서 귀가하며 길가를 해찰했고, 저녁까지 마당 원두막에서 책을 보거나 강아지,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놀았다.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6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급식 먹고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거나 하며 놀고 있으면 지나가는 선생님들마다

"앗, 학생인 줄 알았어요."

"누가 애고 어른인지 모르겠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땐 그게 그냥 인사말인 줄 알았는데 내가 40대가 되고 보니 이제 내 눈에도 20대 청년들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인다.

학생들과 서슴없이 어울리다 보니 개구쟁이 남학생들이 우리 집을 알아내서 자전거를 타고 우르르 놀러 오기도 했다. 선생님의 부모님을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게 할 순 없으니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도록 했다. 아빠는 집에 찾아오는 학생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 수첩에 적어두시며 인연을 간직하고 싶어 하셨고, 아이들도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넉살 좋게 놀다가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졸업하고 다음 해에도 6학년을 맡았는데, 어쩌다 그랬는지 우리 반도 아닌 옆반 여학생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키가 자그맣고 얼굴이 귀여운 아이였는데, 차분하면서 어쩐지 성숙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고 27살의 나와 13살의 그 소녀는 오랜 친구처럼 편안했다.

어느 주말이었나, 그 애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여느 때처럼 아빠는 우리 집에 온 그 아이에게 이름과 가족 관계, 연락처 등을 물으셨고, 아이의 친아빠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엄마, 새아빠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철없던 나는 동요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게 그 아이를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는 아이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신 것 같다. 친아빠가 너무 그리워도 그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을 아이에게

"너희 아빠 보러 갈래? 아저씨가 데려다줄까?"

하시니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아빠와 그 아이, 나는 함께 차를 타고 아이의 아빠가 모셔진 납골당에 갔다. 아이는 말없이 아빠의 납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그 뒤로도 아이는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고 아빠는 자상하게 아이를 대해주었다. 철없던 나는 아빠가 나보다도 그 애를 더 챙기는 것 같아 심통이 난 적도 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우리 아빠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스물일곱의 그때 내 인생의 1막이 닫혔고 이제 결코 이전과 같은 마음을 누릴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홀로 남은 엄마를 염려해야 하고 어른의 짐을 조금씩 나눠갖게 되었다.


세월이 흘렀고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그 아이의 아빠가 모셔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아이와 우리 아빠를 생각한다.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셨던 우리 아빠, 이제 그 마음이 제대로 보인다. 열한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읜 우리 아빠는 열세 아이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딸과 아내를 두고 떠나야했던 그 아이의 젊은 아빠의 마음을 보셨다.

더 오래 함께 살아가고 싶은 마음들.

마음들에 내 것도 보태졌다.

저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동글어가는 몽돌들 같다. 아프고 슬프고 그립고 단단하다.

파도가 오면 함께 소리내어 보는 몽돌들


그 시절 밤에 자다 깨면 안방에서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고 푸념하셨지만, 난 그 소리에 마음이 편안했었다. 낮의 노동 후 밤에 곤한 잠을 주무시는 그 소리가 좋았고, 엄마와 아빠가 옆방에 계시다는 게 마음 든든했다. 그때의 그 기분이 지금도 그립다.

내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이제 나의 아이들을 보며 나와 남편이 아이들에게 그런 부모로 존재함을 깨닫는다. 부모 그늘에서 세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을 보며 아빠와 못다 한 시간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빠야, 어디를 가야 당신의 마음처럼 살 수 있을까.

그 어디가 아빠의 내가 있는 곳이길 바라요. 그리고 그때의 나보다 어른이 되었을 그 아이의 그 곳도 같은 곳이기를. 많이 웃으며 살고 있기를.


추석이라, 그곳을 지나다 떠오른 지난날 김 선생의 아빠와 제자 이야기를 꺼내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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