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와 한국의 거리
타국에서의 삶.
가장 먹먹하고 무거운 순간은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일일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절여오고, 말하지 않아도 눈물이 고인다. 그런 일이 제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언젠가 나 역시 그 소식을 수화기 너머로 듣게 될지 모른다.
그나마 스스로를 달래는 마음은 단 하나다.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곁에 있을 수 있다는 믿음. 아마 그것이 멀리 사는 나에게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큰 아픔을 겪은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가족에게서 급한 연락이 온 순간, 그녀는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찾아야 했다.
한국까지 이어진 15시간의 비행길은 그녀에게 끝없이 길고도 조용한 터널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건 단 하나였다. 두 손을 꼭 쥔 채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제발, 제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주세요.”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을 만큼만 기다려주세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게는 그 순간 가장 간절한 기도였다.
이 외침은 단지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부탁이 아니다.
서로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가깝다.
팀원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팀원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우리 팀 다섯 명 중 네 명이 이민자라는 사실.
모두가 그 슬픔을 알고 있었다. 또 그 일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다는 것도, 누구 하나 먼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우리는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그녀가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정말 미안하다. 너의 슬픔을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와 너의 가족이 이 시간을 잘 이겨내길 기도할게."라는 말만이 전부였다.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팠는지 짐작이 갔다. 마치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그녀가 얼마나 무너졌을지 짐작이 갔다.
우리는 한없이 울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렁그렁한 퉁퉁 부은 눈, 통 잠을 못 잤는지 홀쭉해진 얼굴, 더 가늘해진 그녀가 우리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아빠가 오랫동안 아팠던 게 아냐. 수술도 잘 됐었고, 우리 가족은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아빠는 편안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셨어.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어. 너희들의 기도 덕분이야."
그녀의 말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안도였다.
캐나다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지 못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곁에 있지 못하면 어쩌지?‘
마음이 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슬프다. 한국에 부모님이 계신 이민자라면 언젠가는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부모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 없이 편안하길,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어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기를.
하지만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 소박한 바람조차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매번 깨닫게 한다.
언제나 ‘거리’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고, 벽 너머로 나의 염원이 닿기를 그저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