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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생겨버렸다.

삼겹살 먹으러 갔다 반려인이 돼서 돌아왔다.

by 물질하는 남자

제주에 집이 생겼다. 약 3년 만에 편히 몸을 뉘 일 곳이 생긴 것이다. 계획했던 대로 오래된 주택을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하기 위해서 셀프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종일 뚝딱 거리고 식사는 라면 아니면 국밥으로 때웠다. 리모델링이 끝날 때까지 식대를 아껴보려는 요량도 있었지만 추운 겨울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국밥만 한 메뉴도 없었다.

추웠던 리모델링 작업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국밥만 먹다가 유난히 작업이 많았던 어느 날 영양 보충 겸 기분 전환 겸 고기를 구워 먹으러 가기로 했다. 돌창고를 개조해서 고깃집으로 영업하는 곳으로 갔다. 집에선 약간 떨어져 있지만 고기맛도 좋고 분위기가 운치 있었기 때문이다.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고기가 빨리 익는 것도 아닌데 식당에 우리 말고 다른 손님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둘은 세상 집중해서 고기가 익어 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드디어 고기가 익었고 신나게 배를 채우고 나니 옆테이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뚫어질뻔한 고기


단체로 오신 분들 같았는데 유난히 목소리가 큰 분이 있었다. 스쿠버 다이빙 장비 제조 업체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길래 혹시 아는 분일까 하고 얼굴을 보니 예전에 스쿠버 다이빙센터를 할 때 거레처 이사님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고 이사님도 반갑게 받아 주셨다.

이강사 합석하지!!


이사님의 한마디에 우리는 합석을 했다. 다행히 그쪽 일행은 대부분 다이버들이었다. 다이버들이 모이면 다이빙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들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2차는 고깃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이사님 회사의 제주 지사였다. 1층은 사무실이고 2,3층은 숙소로 쓸 수 있는 건물이었다. 1층에는 아르와 곤이라는 골든레트리버 한쌍을 기르고 있었고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는 새끼 골댕이들이 여덟 마리도 있었다. 일행 중에는 그 여덟 마리 중 한 마리를 분양받으러 오신 분도 있었다. 그분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자주 출연하시는 배우분이셨고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오셨다. 강아지를 데려가려 했던 이유는 아들이 키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차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강아지들을 구경하러 갔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골든레트리버를 본 적이 있는가?? 보통 인절미 혹은 꼬물이라고 많이들 표현하지만 나는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인절미를 본 적이 없다. 아이보리빛 털뭉치들이 반은 걷고 반은 기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를 띠게 하였다. 강아지들을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폭신하고 따듯한 감촉이 내 손과 볼에 느껴지는 듯했다. 아직 추운 겨울이었지만 보고만 있어도 따듯해지는 느낌이랄까...

"댕댕이들~"

이사님이 강아지들 밥을 들고 등장하셨다. 자기들 밥인걸 알아차린 강아지들은 혼비 백산 해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아가들이라 사료를 물에 충분히 불려서 닭 육수와 섞어 죽처럼 만들어 줬다. 밥그릇에 자기들 앞발을 담근 채, 밥을 먹는 건지 자기 발을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허겁지겁 먹어 댔고 개밥그릇 바닥까지 깨끗하게 핥아먹고는 주둥이와 발에 닭국물과 흙이 범벅이 된 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닭국물이 묻었던 똥물이 묻었던 얼마든지 안아줄 테니 나에게 와라. 이 귀여운 생명체들이 내가 좋다고 달려오는데 그깟 닭국물정도가 뭐가 대수란 말인가...' 같이 있던 짝꿍도 이미 강아지들한테 푹 빠져있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칼바람이 부는 제주도 겨울밤이었지만 그 당시 그 자리에 기온이 1도 정도는 올라간 듯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강아지 구경을 하고 올라와서 2차를 시작했다. 강아지 키우는 이야기와 다이빙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강아지를 입양하러 오셨던 배우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사님 아무래도 우리는 힘들겠는데요. 아이가 무서워하네...

'아르'와 '곤'

대형견을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강아지들의 성장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자고 일어나면 커있는 정도가 아니라 과장을 조금 보태서 몸이 커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는 정도랄까? 이 작은 강아지들이 어떻게 40~50kg까지 클 수 있을까 싶다가도 한 달만 지켜보면 50kg이 아니라 이러다 나보다 커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정도니까 말이다. 그 점이 걱정되셨던 배우님은 아이에게 새끼 골든레트리버가 아닌 부견인 '곤'이를 보여 주었다. 곤이는 50kg가 넘는 레트리버 중에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다. 자기 몸무게에 두 배가 넘는 큰 개가 어두운 밤에 견사에서 짖는 모습을 본 아이는 겁을 먹었고 아빠에게 작은 강아지가 키우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쩔 수 없지."

아이와 곤이의 만남을 지켜보셨던 이사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는지 이해해 주셨고 다시 제주도 스쿠버 다이빙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할 때

"이강사 지금 집이 주택이지?"

"네!"

"마당도 있고??"

"네!"

"강아지 좋아하지?"

"네!"

"이강사가 데리고 가면 되겠네."

"네????"

"입양 취소 됐잖아. 이강사가 데리고 가면 딱 좋겠네 주택에 마당도 있고"




제주도로 이사 오면서 짝꿍과 나는 반려견을 키우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긴 했다. 그리고 만약에 키우게 되면 팻샵이나 개농장에서 사 오는 게 아니라 유기견을 입양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골든레트리버를?

이제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반려동물을 들인다는 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을 이렇게 갑자기 술 먹다가 결정하라니...

세계여행 당시 숙소 예약도 없이 비행기표를 공항 가서 가장 빠른 걸로 달라고 했던 파워 P들이라곤 하지만 이건 조금 망설이게 되었다. 짝꿍과 벙 찐 표정으로 둘이 3초간 마주 보다가

"네...!!"

대답해 버렸다. 심사숙고 시간 3초, 그렇게 강아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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