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S가 뭔가요?
아직 집이 내부 수리 중이라 먼지가 많이 날리고 정리도 안 돼서 바로 강아지를 데리고 오진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집을 정리하고 1주일 후에 강아지를 데리러 갔다. 그 1주일 동안 우리는 매일 강아지 이름을 고민했다. 보리, 감자, 메밀, 우동 등등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두부'로 정했다. 보리는 우리나라 리트리버들 이름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라고 해서 탈락! 감자는 얼마 전 만난 다른 집 강아지 이름이라 탈락! 우동은 일본말이라 탈락! 두부와 처음 만났을 때 털 색깔이 두부처럼 뽀얗기도 했고 두부처럼 말랑말랑하니 순하게 생긴 것이 '두부'가 딱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후보들이 다 식재료나 음식인 이유는 먹는 걸로 반려동물 이름을 지어주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고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 집 고양이들 이름은 '마늘'과 '가지'다. 두부를 데리러 다시 갔을 때는 다른 강아지들은 전부 입양을 가버리고 두부 혼자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난 두부는 더 이상 기어 다니지 않았고 짧뚱한 주둥이도 약간이지만 길쭉해진 게 1주일 사이 꼬물거리는 인절미에서 개구쟁이 강아지로 성장해 있었다.
두부가 집에 왔다. 두부 방석과 쿠션을 샀다. 아직 집 내부 인테리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나 기타 가구들이 들어오기 전이었고 우리는 바닥에 캠핑용 깔판과 침낭을 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강아지도 있는 침대가 우리만 없을 순 없다며 우리도 얇은 스펀지로 된 매트리스를 하나 장만했다. 두부는 대부분의 한 달 된 강아지들이 그렇듯이 자기 자리를 두고 우리 품으로 파고들었다.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발 아래쪽, 방구석에 두부 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불이 꺼지면 어김없이 우리 매트리스로 올라왔고 침낭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 뽀얗고 귀여운, 심지어 따듯하기까지 한 생명체를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다.
"두부 안돼. 하우스!!"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 자리로 올라온 두부를 밀어냈다. 두부는 '무슨 일이지?' 하는 표정으로 몇 번의 시도를 해보다가 올라오면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세상 억울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불이 꺼지고 우리가 잠들 때쯤 되면 슬금슬금 기어올라와 왔고 겨드랑이던 가랑이던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나는 그 포근함과 꼬순내에 무장 해제가 되었고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하고 함께 잠들곤 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터졌다. 그날도 잠이든 내 가슴으로 두부가 파고들었고 잠시뒤 포근함이 아닌 축축함이 느껴졌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일어나서 불을켰고 두부는 내 침낭 위에 이미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젖지 않은 매트리스 위로 자리를 옮겨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이게 반려생활이구나...' 후회나 분노보단 어떤 깨달음을 얻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면서 두부는 점점 커갔다. 오줌 사건이 있기도 했고 집수리도 얼추 마무리단계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방에서, 두부는 거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직 가끔 실수를 하긴 했지만 대소변도 어느 정도 가릴 수 있게 되었고 접종도 끝나서 산책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힘이 없어 보였다. 딱히 어디가 아파 보이는 건 아닌데 3개월 된 레트리버가 이렇게 얌전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강아지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반려견들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그들만의 '의식(?)'같은 게 있다. 보호자를 만나면, 그게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의식'을 거행한다.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배를 까뒤집고 굴러다니기도 한다. 어디 갔다 왔냐며 흐느껴 울기도 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강아지마다 다르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실수를 말 그대로 '지려'버리기도 한다. 이 의식은 보통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강아지가 어리면 어릴수록 길고 성대해진다.
두부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치르긴 치렀다. 밤새 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면 두부는 꼬리를 흔들면서 배를 까 뒤집고 나를 반겼다. 발도 핥아보고 어떻게든 안겨보려고 나에게 비비적거리고 껑충껑충 뛰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1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지곤 했다. '다른 강아지들은 제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던데, 결국 혼나고 나서야 그 의식이 강재로 끝난다고 하던데 우리 강아지는 왜 이렇게 짧게 끝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냥 우리 강아지는 얌전한 강아지라 다행이다 라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 아주 안 먹는 건 아닌데 사료를 몇 알만 먹고 뱉는다던가 냄새만 맡고 안 먹는다던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료를 종류별로 먹여 보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전자레인지에도 돌려보고 고기 육수도 뿌려줘 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거의 먹지 않았다. 가끔씩 거의 하루종일 굶은 날에만 캔사료를 조금씩 먹곤 했다. 식욕이 없는 리트리버라니... 노견도 아닌 3개월 된 리트리버가 식욕이 없다는 건 분병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또 한 가지 골치 아픈 일은 이식증이었다. 밥은 안 먹으면서 양말, 휴지, 마스크 등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은 꿀떡꿀떡 삼켰다. 집에서는 양말이나 휴지를 잘 치우면 되지만 산책하는 동안에는 문제 행동이 계속되었다. 물론 강아지들 대부분이 씹는 걸 좋아하고 특히 어릴 적에는 호기심이 많아서 더 하다곤 하지만 두부는 조금 심했다. 말리지 않는 나면 집에 있는 양말을 한 짝도 안 남기고 먹어버릴 기세였고 산책 중 눈에 띄는 휴지와 물티슈는 모조리 씹어 먹으려고 했다.
식욕 부진과 이식증이 점점 심해지자 우리는 동물병원을 가보기로 했다. 지인의 소개로 집에서 조금 떨어진 유명하다는 동물병원을 찾았다. 수의사 선생님께서는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하셨고 몇 주 뒤에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땐 피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PSS 같은데요.
"네??"
"간문맥전신단락증 이라고도 하고요 쉽게 말하면 비정상적인 혈관 때문에 간으로 혈액이 가지 못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7년 동안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던 짝꿍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병원이라곤 운동하다 다쳐서 가끔 갔던 정형외과가 전부였던 나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내 표정을 보신 수의사 선생님께서 설명을 이어가셨다.
"원래는 심장에서 나온 혈액이 위장, 소장, 대장, 신장 같은 각 장기를 거쳐서 간 문맥을 지나 간으로 들어간 뒤 영양분저장과 해독과정을 거친 후 다시 후대정맥을 통해서 전신 혈관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pss는 이과정을 방해하는 혈관이죠. 간으로 들어가야 할 간 문맥의 혈액들이 간을 거치지 않고 비정상적인 혈관을 통해 후대정맥으로 흘러가게 되죠. 간을 거치지 못하니까 간에서 해독되어야 할 독성이나 암모니아, 세균등이 해독 안된 상태로 전신을 돌아다녀서 간에도 문제가 생기고 병이 생길 수 있어요.
특히 암모니아는 간으로 가서 요소로 변환되어 혈액으로 나가 신장에서 배출이 되는데 간으로 못 가니까 암모니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뇌혈관으로 들어가서 간성 혼수를 일으키게 될 수도 있고요. 심할 경우는 발작이나 경련이 오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간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보시면 되는데, 간이 기능을 못하니까 하루 종~일 피곤하고 식욕도 없고 활력도 없는 거예요."
"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강아지들에게선 가끔씩 나타나는 증상인데 비정상 혈관만 막아주면 됩니다. 간단한 수술이에요. 그전에 일단 시티를 한번 찍어봐야 합니다. 제주도에는 CT 찍을 수 있는 병원이 아마 제주대학교밖에 없을 거예요."
" 네 알겠습니다. "
병원을 나와서 두부를 처다 보았다. 그냥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아파서 그랬던 것이라 생각하니 안 그래도 억울하게 생긴 얼굴이 괜히 더 불쌍해 보였다. 아침마다 꼬리를 흔들고 만져달라고 부비적거리다가 1분도 채 되지 않아 바닥에 널브러졌던 게 자기 딴에는 혼신에 힘을 다해서 나를 반긴 거라고 생각하니 안쓰럽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얌전한 강아지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도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했으니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제주대학교 병원 예약부터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밤 12시가 넘어서 두부는 응급실로 실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