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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밤, 숫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엑셀 속 숫자, 그리고 우리의 변화

by rufina

매월 28일, 남편과 나는 월례행사처럼 하는 일이 있다.
쌍둥이가 잠들고 집 안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만의 시간.
그 시간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난 한 달의 흔적을 정리한다.


남편의 컴퓨터를 켜고, 엑셀 파일을 연다.
관리비, 식료품비, 인터넷, 전기세, 교통비, 보험비, 의료비, 외식비, 용돈…
하나씩 채워 넣다 보면 숫자들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이번 달의 선택과 하루의 무게가, 고요한 셀 안에서 조용히 되살아난다.


최근 몇 달간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의 소비 구조와 생활 패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음을 느낀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식료품비,
그리고 낮은 외식비를 보며
우리가 얼마나 ‘집밥’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실감한다.


한국에 살던 시절, 남편과 나는 주 1회 이상 외식을 했다.
요리가 귀찮은 날엔 “오늘은 그냥 나가서 먹을까?” 하며 쉽게 식당을 찾았다.
집을 나서면 한식, 중식, 양식, 일식까지 선택지가 넘쳐났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식당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
우리 동네만 해도 식당은 단 두 곳뿐이다.
게다가 외식비 부담도 크다.
저렴한 음식에 속하는 케밥조차 단품이 약 150 크로네,
한화로 2만 원이 넘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집밥 위주의 생활로 바뀌었다.
남편은 평일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게 일상이 되었고,
나도 하루 세끼를 집에서 준비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처음엔 매끼를 직접 해 먹는 게 귀찮았다.
가끔은 남이 해주는 밥이 그리웠다.
하지만 집밥의 장점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레시피 없이도 척척 해낼 수 있는 요리가 늘었고,
‘오늘은 뭘 먹을까’ 함께 고민하며 장을 보는 시간도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가족의 건강을 생각한 식탁을 차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렇게 집밥과 도시락이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이것이 내가 노르웨이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익숙하고 편했던 것에서 낯설고 불편한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그것을 편안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그게 어쩌면 ‘적응’이라는 이름의 성장일 것이다.


이제 엑셀 속 숫자들이

앞으로의 우리 삶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작은 기록들이 모여 우리의 하루를 증명하고,
그 흔적 속에서 또 다른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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