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심부름
여자는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문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도망가면 신분이 들키고, 여자를 죽이자니 입국 후 행방이 묘연해서 수사가 시작될 것이 뻔했다. 손톱만 물어뜯은 지 2시간여 됐을 때, 여자 집주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황숙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수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아니면 전화를 받지 말까 온갖 생각이 다 드는 찰나, 방에서 나온 여자가 문수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네, 숙희 이모. 저 미소예요. 엄마 지금 화장실 잠깐 가셨네? 이따가 전화드리라고 할게요."
전화를 끊은 여자는 소파에 앉아서 멍하게 있는 문수를 쳐다봤다.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쓸모가 없겠네. 쯧."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린 여자, 미소. 미소를 쫓아 문수는 방금 자신을 무시한 거냐며 따졌다. 그러자 미소가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수에게 다가갔다.
"야, 너만 사람 죽여본 줄 알아? 멍청한 새끼. 지금 네가 누굴 상대하는지 알기나 해?"
미소는 네일아트를 한 긴 검지손톱으로 문수의 쇄골을 쿡 찌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문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문수는 이 여자에게 한동안 꼼짝도 못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집에 있는 두 명 모두 살인마란 것이다. 이 여자의 살인방식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고 힘으로는 통할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머리를 써야 하는데, 문수는 도저히 이 여자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왜? 날 죽이면 안 될 것 같고, 같이 가자니 등골이 서늘하니?"
문수는 미소에게 완전히 생각을 읽혔다. 이 여자 대체 뭘까. 부모가 죽었다고 축배를 들고, 그러다 졸려서 잠자고. 문수보다 더 큰 연극을 펼치는 대배우 같았다.
"나랑 거래해. 부모님 죽인 거 묵인해 줄게. 대신, 너도 내가 시키는 거 해. 네 꼴을 보아하니 머리가 그리 좋진 않아 보여서 딱 네 수준에 맞는 심부름 하나 시킬게."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거실로 나가버리는 미소를 따라 문수도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갔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문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본 후 여자는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야, 너 입고 있는 거 다 김성진 꺼네? 얘 웃긴다. 네 왼팔 손목에 S.J.K 김성진 이니셜인 건 알고 입었어? 푸하하."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이니셜이 있었다. 모든 와이셔츠에 이 이니셜이 있었는데, 문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브랜드 이름인 줄 알았다. 문수는 이니셜을 다른 손으로 쓱 가렸다.
"가리지 마. 내가 널 이제부터 진짜 김성진으로 만들어줄게. 어때? 거래하자. 네가 김성진부터 우리 부모님까지 죽인 거 모두 다 비밀로 해줄게. 넌 내 심부름 하나만 해. 그거면 돼."
미소는 사람을 턱을 치켜들며 보는 버릇이 있었다. 문수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냥 정말로 버릇처럼 보였다.
"어떤 심부름인데.. 요."
"다른 집으로 이사가. 네가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든, 난 상관 안 해. 같은 수법으로 내가 지정하는 집으로 가. 그리고 그 집주인도 죽여.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집에 있는 달항아리를 팔아."
이렇게 간단한데 심부름이라고 부르기도 뭣했다. 문수는 그에 따른 보상은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자 미소는 특유의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묵인. 묵인해 준다니까. 몇 번을 말해?" 아, 그랬지. 묵인해 주는 조건으로 심부름해 주는 거였지. 문수는 자신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걸 깨달았다.
"지금 당장 실행해도 좋고, 네가 준비가 되면 시작해. 네 침실은 부엌 옆 게스트룸 써."
문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소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수는 자신이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거래가 맞는 걸까.
다음 날, 문수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이 거래가 맞는 건지 아닌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소가 더욱더 문수를 옥죄어 올 것 같았다. 차라리 아침부터 바로 심부름을 시작하기로 했다. 먼저 미소의 방에 노크를 했다. 세 번 정도 노크하자 문이 열렸다. 미소는 헝클어진 머리로 포스트잇 한 장을 주고는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창송대로 821'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주소로 문수는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