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학고 2학년 2학기 이야기
조기진학 실패, 내신 하락, 전국과학전람회 진출 실패.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겹쳐졌던 시절, 저는 스스로 바닥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공부를 더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잇따른 실패는 제 자신감과 동기를 모두 앗아갔습니다. 당시 제 성적은 종합적으로 4등급 초반대였기에, 노력 여하에 따라 좋은 대학을 노려볼 수도 있는 위치였지만, 제 마음은 우울감과 자괴감으로 짓눌려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응원이 있었음에도 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죠. 모든 것이 막막했고, 앞으로의 모든 순간이 두렵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신 부모님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학원에서 있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우울한 저를 보고 “이제 끝났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순간, 제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말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것을 나를 평가하고 단정 짓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은 곧 저를 일으켜 세운 동력이 되었고, 잡념과 두려움을 지워버렸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펜을 들었을 때,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순조롭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한 끝에 2학년 2학기부터는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고 2학년 2학기에는 고급수학 I을 비롯해 고급 생명과학, 고급 물리학, 고급 화학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급수학 I에서는 행렬, 복소평면, 그래프 이론 등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접하기 힘든 내용을 다뤘습니다. 개념 자체는 어렵지만, 문제의 난이도는 비교적 직관적이었기에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습니다.
고급 생명과학, 물리학, 화학에서도 점차 개념이 익숙해지자 문제를 푸는 속도와 정확도가 향상되었습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 최종 성적은 2등급 중반대로 상승했습니다. 물론 조기졸업과 진학을 준비한 친구들이 빠진 덕분에 경쟁이 줄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성적이 오른 사실 자체만으로도 저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시작된 겨울방학은 제게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3학년 1학기부터는 AP 과목(Advanced Placement)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과목들은 고등학교에서 대학 수준의 내용을 미리 배우고 성취하면, 카이스트, 유니스트, 포스텍 등에서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수업과 시험은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학습량 또한 엄청났습니다. 예를 들어, 고급 생명과학에서 1년 동안 배우는 내용을 AP 일반생물학에서는 단 한 학기 안에 소화해야 했습니다. 영어로 쓰인 생물학 전문 용어(Terminology)를 외우고, 이를 기반으로 문제를 풀어야 했기에 절대적인 공부 시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 겨울, 제 일상은 “극한의 루틴” 그 자체였습니다. 오전 10시에 독서실에 들어가 수, 과학 책을 펴고 공부를 했으며, 학원에 갈 때도 틈틈이 차 안에서 Terminology를 암기했습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탠딩 책상에서 서서 공부하거나,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엄청나게 마시곤 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독서실이나 학원 자습실로 돌아가 복습을 마치고, 밤 12시에서 새벽 1시에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평균 순공부 시간은 최소 8시간, 많게는 14시간에 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생활 속에서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화가 나도, 울분이 쌓여도,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쳇바퀴처럼 달려야 했습니다.
겨울방학,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발신자는 조기졸업 후 서울대 생명과학과에 진학한 친한 친구였습니다. 평소라면 반가운 전화였겠지만, 그날의 저는 심리적으로 바닥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독서실로 돌아간 뒤였는데, 핸드폰 화면에 친구의 이름이 뜨자 무겁던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일단 전화를 받고 1층으로 내려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잘 지내고 있냐?"는 친구의 물음에, 저는 평소처럼 “괜찮아”라고 답했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제 속마음을 숨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친구가 학교 생활과 공부는 어떤지 묻자, 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제 상태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너무 힘들어. 이렇게 공부를 해도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어.”
친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저는 마치 둑이 무너진 듯,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아무리 해도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아. 내가 지금 이걸 다 해내고도 잘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끔은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제 목소리에는 억누르려는 울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친구는 한동안 말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는 마치 제 마음을 읽은 것처럼 들렸습니다. 힘들었던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그 과정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금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래서 내가 뭐라 말해도 위로가 잘 안 될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네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상을 받을 거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 그리고 정말로 힘들 땐 나한테 언제든 전화해. 나 여기 있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안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공감 어린 말들은 마치 꽉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 같았습니다.
갑작스럽게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고, 이내 참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건물 1층에서 전화를 붙잡고 울던 저는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에게 아마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이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결같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며, “울어도 괜찮아. 참지 마.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은 마치 따뜻한 손길처럼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과 스트레스가 모두 해소되는 느낌이었죠.
1시간 남짓 이어진 전화가 끝났을 때, 제 마음속은 묘하게 가벼워졌습니다. 마치 거대한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보자. 네가 할 수 있다는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날의 전화는 제게 단순한 위로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친구의 공감과 격려는 제가 그동안 홀로 짊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해 주었고, 저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고, 그날 이후로 저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무작정 성적과 결과에만 집착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공부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은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잠시 쉬는 법도 배웠습니다. 너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만 해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통해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친구의 전화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제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도전할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었죠.
그러던 중, 저는 운 좋게도 포스텍 IRP 캠프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학교에서 단 두 명만 선발되는 자리였는데, 제가 그중 한 명으로 뽑힌 것이었죠. 캠프에 참가한 경험과 고등학교 3학년에서의 이야기는 또 다른 도전과 배움의 여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은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도록 만든 독기, 친구의 위로를 통해 얻은 치유, 그리고 공부를 즐기는 방법을 배운 것까지. 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포스텍 IRP 캠프와 고등학교 3학년의 새로운 도전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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