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EP.06 아낌없이 주는 나무

• 곰신 아니고 등신

by lune

"곰신은 살면서 한 번쯤은 해볼 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곰신 안 해본 사람들일 거다. 일말상초, 군대 가면 헤어지고 남자는 변하고 서로 사랑이 식는다는 건 다 남들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도 하얀 안개처럼 뿌얘지면서 앞이 안 보이더니 걷혀가고 있다. 그래서 일말상초? 지금은 남의 얘기 같기도 하다!


남자친구가 입대할 때쯤 사실 별생각 없었다. 이 사람과는 내가 평생 함께할 거라는 자신도 있었고 이 남자가 아니라면 굳이 다른 남자를 만나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기에 연애 초였던 나는 남자친구에게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엄청난 발언을 했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왜냐면 저 발언은 남자친구가 군 안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탓하기 좋은 아이템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23년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 사이에 내 옆에서 사라졌다. CC였던 우리는 잠만 각자 집에서 잤지 매일을 붙어있었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더욱더 컸다.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였고 주말 딱 한 시간 휴대폰 받는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훈련소 때 1시간은 나에게 1분 같았다. 이렇게 남자친구는 귀한 자신의 시간을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수료식 날 더 늠름하고 멋있어진 남자친구를 보면서 또 반하게 되었다.


자대배치 후 급격히 예민해지고 힘들어하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둘에게 처음 있는 일들이라 정말 많이 다퉜다. 돌이켜 보면 남자친구는 적응하는 데에 힘들어서 나 좀 다독여줘, 나는 밖에서 너의 빈자리가 너무 커 나 힘들어 나 좀 다독여줘..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우리는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힘든 포인트들을 알아채며 우리가 떨어져 있다는 걸 체감하면서 일병이 되었다.


남자친구는 원래 취사병으로 보직을 배정받았었다. 그래서 다른 군인들보다 개인 정비 시간이 많이 적었다. 나는 남자친구와 연락을 적게 해서 불만, 남자친구는 쉬는 시간이 너무 없고 업무가 어렵고 지쳐서 불만이었다. 근데 남자친구의 불만은 하나 더 있었다. 취사병이라 외출, 외박, 휴가, 면회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고 나는 다른 곰신들보다 그 모든 만남이 많이 늦었었다. 겨우 면회를 잡아갔을 때 먼 길을 갔기에 피곤했지만 남자친구를 보니 그 모든 힘든 마음이 사라졌었다. 그러다 어떠한 일을 계기로 남자친구는 보직을 변경하게 되었고 우리의 만남은 남들만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데이트는 우리의 사랑을 더 애틋하게 만들어주었고 서로의 사랑을 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그 한 달에 한 번 사회에 나올 수 있는 시간을 어김없이 나와 함께 사용해 주었다. 나는 그게 늘 고마웠다. 주중에는 매일 전화를 하며 다투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 다툼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생각은 나에게만 적용됐는지도 모른다. 남자친구는 군대를 갔지만 아직 어린 아이다. (군대 가면 철든다는 말은 어디서 온 건가요..? ㅎㅎㅎ)


그리고 드디어 '일말상초'가 다가올 무렵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EP.04에 자세히 나와있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바로 본인의 은밀한 성취미를 즐기지 못하는 거.. 본인 개인 정비 시간에 그 시간을 나와 대부분 사용하다 보니 본인의 성적취미를 거짓말을 하면서 했다나 뭐라나~.. 이 일을 계기로 신뢰에 금이 가서 우리는 그 신뢰 회복을 위해 서로 죽을 듯이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시간은 또 흘러 새해를 맞이했고 남자친구는 상병이 되었다.


기나긴 군생활의 반이 지나간 것이다. 과거의 우리의 짜디짠 눈물들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지금 사랑이 더 좋아졌고 서로가 은연중에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체감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친구는 군복무 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져 군태기가 왔고 나는 밖에서 나의 자리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상병이 되니 우리 사이에 변한 게 하나 있다면 나와 남자친구의 입장이 바뀐 듯했다. 처음엔 내가 예민했다. 모든 게 불만이고 잘 챙겨주는 남자 친구를 그때는 무심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친구가 군태기가 오면서 많이 힘들어한다. 남자친구에게서 내 모습이 조금씩 보이더니 나는 거울치료를 통해 남자친구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조금 더 다독여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 중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은 반의 곰신 생활이 기대가 된다. 우리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나만 잘하면 돼."


요즘은 남자친구의 휴가 전까지 외출, 외박도 다 썼기에 매주 토요일마다 왕복 5시간 면회를 가고 있다. 나도 나의 일정들이 있기에 그 일정에 시간을 내어 먼 길을 가는 게 피곤하고 지치기도 하지만 얼굴을 보면 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지만 누가 그래? 곰신은 살면서 한 번쯤 해보면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누가 꽃신 신으면 행복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고 해? 곰신이 아니고 등신이다. 내 시간, 체력, 나의 모든 사랑과 마음을 다 쏟아부으며 헌신하는. 그걸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다 생각하는 게 곰신들이니 우리는 등신이다. 좋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배려하며 나누어주는.


keyword
월, 화 연재
이전 05화EP.05 결국 우린 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