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달리려고 마음 먹어도 결국 원래 속도로 돌아오면 런린이
하프를 두 시간 안에 완주하고 나면 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는 좀 달릴 줄 아는 사람 아닐까?’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32km 마라톤을 신청하고,
공교롭게도 하프 구간이 넘어선 순간 급격한 페이스 저하를 겪었고,
결국 완주는 했지만 결과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면 풀코스를 즐겁게 완주하겠다는 내 계획은 허튼 기대였다.
그래서 나는 LSD(Long Slow Distance)에 도전했다. 기록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더 오래 달려보기로 했다. 심박을 낮추고, 호흡을 가다듬고, 일부러 속도를 억눌렀다. 분명 예전보다 훨씬 느린 페이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시간이 가까워지자, 몸이 똑같이 힘들어졌다.
빠르게 달렸을 때와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지만, 결론은 같았다.
‘아, 여기까지인가.’
천천히 달렸는데 왜 똑같이 무너질까?
러닝의 피로는 속도의 함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빠르게 달리면 힘들고, 느리게 달리면 쉽다고 믿는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피로는 속도뿐 아니라 ‘시간’의 함수이기도 하다.
두 시간 동안 반복되는 수만 번의 착지 충격.
계속 상승하는 체온.
조금씩 고갈되어 가는 에너지 저장고.
속도를 낮춰도, 몸이 ‘두 시간 동안 운동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러닝에서는 때로 속도보다 시간이 더 정직하다.
인체의 글리코겐 저장량은 대략 90~120분 정도의 운동을 버틸 수 있다. 물론 페이스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이 가까워지면 몸은 분명히 신호를 보낸다.
다리가 무겁다.
집중력이 흐려진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LSD라고 해서 탄수화물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방 사용 비율이 조금 높아질 뿐, 탄수화물 의존은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두 시간은 에너지 시스템이 시험대에 오르는 시간이다.
하프를 완주하는 능력과 그 이후를 버티는 능력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걸,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빠른 러닝은 심박과 호흡이 먼저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느린 장거리는 다르다.
종아리, 햄스트링, 발바닥, 코어.
심장은 아직 괜찮은데, 근육이 먼저 포기한다.
느리게 달리기는 ‘숨이 차서’ 힘든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 지겨워서’ 힘들다.
느림은 편안함이 아니라, 지루함과 반복을 견디는 기술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러너들이 LSD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느린 장거리는 몸을 바꾼다.
미토콘드리아 밀도를 늘리고
모세혈관을 확장시키고
지방 대사 효율을 높이고
러닝 경제성을 개선한다
LSD는 기록을 만드는 훈련이 아니라, 기록을 담을 몸을 만드는 훈련이다.
오늘 당장 빨라지지는 않는다. 대신 몇 달 뒤, 같은 페이스가 덜 힘들어지는 변화를 만든다.
돌아보니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첫째, 어쩌면 충분히 느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짜 LSD는 대화가 가능한 페이스, 최대심박의 65~75% 수준이다. 기록을 포기할 만큼 느려야 한다.
둘째, 보급을 연습하지 않았다.
90분을 넘기면 탄수화물 보충이 필요하다. 장거리는 체력뿐 아니라 영양 전략의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 주간 총거리가 부족했을 가능성.
장거리는 하루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적 거리의 결과물이다.
하프를 완주했다는 사실이, 마라톤을 버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거리 대신 시간을 늘리기로.
90분을 안정적으로 달리고,
그 다음 100분, 110분으로.
기록 대신 심박을 보며 달리고,
빠름 대신 리듬을 택하고,
성취 대신 축적을 선택하기로 했다.
느리게 달리기는 욕망을 내려놓는 훈련이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도 싸우지 않는 시간.
빠르게 달리는 것은 흥분을 준다.
기록은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하지만 느리게 달리기는 다르다.
그것은 절제이고, 기다림이고, 몸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기록은 속도로 만들어지지만,
완주는 느림으로 만들어진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달리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느리게 달리는 건 편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달리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가지 규칙을 정했다.
'일부러 느리게 달리기'
워치로 페이스를 보면서 일부러 730 페이스로 달리기로 했다.
느리게 달린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고, 어느덧 워치를 보면 600 정도로 달리고 있다.
분명 600 페이스가 편한 페이스이긴 한데, 심박이 내려가지 않는다.
730으로 달려보고 심박을 보고, 만약 떨어지지 않는다면,
페이스를 더 느리게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심박수이고, 심박수에 맞는 내 페이스를 찾는게 중요하다.
더 멀리가기 위해 조급함 보다 치밀함이 필요하다.
더 치밀한 계획으로 웃으며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