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에 32k 마라톤 참가해 보고서

힘들긴 했지만 나름 재밌었던 겨울 마라톤

by 구르미


신청할 때만 해도 언제 그날이 오나 싶었는데, 벌써 대회 전날이다. 카보로딩을 해보겠다며 원래 점심에 러닝을 8km 정도 달리고 테익아웃을 먹는데, 이번 주 수요일부터는 달리는 거리를 3km 정도로 줄이고 파스타나 면류로 점심을 챙겨 먹었다. 여간하면 주중에는 탄수화물을 자제했었는데 한번 먹다 보니 입이 트였는지 점심을 테익아웃으로 먹었을 때 보다 저녁에 더 배가 고파졌다. 카보로딩을 핑계로 3일간 우걱우걱 먹어댔다. 아마 대회가 끝나고 나면 다시 예전 루틴으로 돌아가기 좀 걸릴 듯하다.


대회 전날은 항상 조심스럽다. 괜히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다가 다음날 장트러블이 날까 걱정되어 저녁은 오후 6시에 맵고 짜지 않은 한식으로 먹고 그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대회가 토요일인 게 식단 관리를 하기에는 더 나은 듯하다. 바로 전 대회에서는 음식 박람회에서 이것저것 시식을 했다가 대회 당일 아침에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나마 토요일은 그런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퇴근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기로 한 회사 동료한테 메시지가 왔다.

"르미야, 나 망한 거 같아."

"왜? 뭔 일 있어? 어디 다쳤어?"

"아, 그건 아니고 우리 팀장이 술 한잔 하자고 나 포함해서 소집했어."

"헐, 마라톤 있다고 이야기해보지 그래?"

"하필 그 식사의 사유가 내 생일이야."

"쯧쯧, 뛰다 토하기 싫으면 여간하면 안주는 적게 먹어라."

"그래, 행운을 빌어줘. 내일 아침에 보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그렇게 부를 사람이 없어서 편안하게(?) 퇴근해서 주섬주섬 내일 대회를 준비했다.


준비


날이 추워서 걱정되긴 했지만, 한창 추운 시간에 뛰어봐도 3km 정도 뛰면 열이 올라 재킷은 벗어야 했다. 그래서 재킷은 아예 복장에서 제외했다. 대신 대회 사은품으로 받은 긴팔 언더레이어를 안에 입고 위에 긴팔 티셔츠를 하나 더 입기로 했다.


바지는 조금 얇은 러닝용 긴바지를 입기로 했고, 양말은 데카트론에서 구매한 레이온 소재의 방한성 양말로 선택했다. 신발은 반발력을 고려해서 훈련용과 대회용을 나눠서 신고 있다. 저번 11월 대회 이후 2개월 만에 다시 신는 줌플라이. 더 좋은 신발도 많지만 풀코스 완주하면 그때 좋은 신발을 사기로 하고 당분간은 이걸로 주구장창 신을 예정이다. 바람에 머리가 추울까 봐 모자를 쓸지 말지 고민했는데, 원래도 모자를 잘 안 썼었던 터라 이번에도 눈에 흐르는 땀을 막기 위해 헤어밴드만 할 예정이다. 그리고 안경은 렌즈 끼고 고글을 낄까도 생각해 봤지만 다행히 내 눈지컬이 좋아 햇빛에 그렇게 방해를 안 받아서 운동할 때 쓰는 티타늄 안경을 쓰기로 했다. 헤어밴드와 안경을 함께 쓰면 헤어밴드 덕분에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아 좋다. 손이 시릴 수 있으니 장갑도 꼭 챙겨야 한다.


에너지젤은 저번에 직구로 샀던 GU 제품을 이번에도 먹을 예정인데, 여러 개 먹어봤는데, 나한텐 이게 제일 잘 맞아서 이걸로 정착했다. 대신 엄청 점도가 높아서 꼭 먹고 물을 마셔야 해서 급수대가 있어야만 먹을 수 있다는 게 좀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덕분에 부피가 작고 카페인도 들어가 있어서 각성효과도 있기에 좋다. 7km에 하나씩 먹을 예정이라 4개+여분 1개 5개 챙겼고, 출발 전에는 저번 MBN 대회에서 받았던 좀 더 대용량 제품을 먹을 예정이다. 이것도 얼른 먹고 치워야지 계속 자리 차지하는 게 영 보기 싫었다.


맡길 가방에는 대회 끝나고 바로 입을 보온재가 들어간 재킷과 쿨링 타월, 그리고 물을 넣었다. 두꺼운 패딩을 넣을까도 했는데, 어차피 웜업 할 때 일회용 우비 입으니 패딩이 필요 없고, 경량 재킷도 나름 따뜻해서 가볍게 준비했다. 쿨링 타월은 물티슈 비슷한데 펴보면 수건 정도 길이가 돼서 급할 때는 화장실에서 몸 전체를 닦기에도 충분하다. 여름에 특히 잘 썼는데, 이번에는 끝나고 얼굴과 목에 난 땀 정도를 바로 닦을 수 있을 듯하여 준비했다. 겨울이라도 그냥 땀이 굳으면 정말 찝찝하니 바로 닦는 게 좋다.


그렇게 준비를 다 하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것도 대회라고 왠지 긴장이 됐다. 저번에 처음으로 하프 뛸 때도 한 시간 간격으로 깼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한 시간 간격으로 깨다가 4시에 눈이 번쩍 띄었다. 억지로 다섯 시에 다시 잠이 들어 7시 기상, 장트러블을 고려해 아침은 스킵하고 러닝 메이트와 함께 궁평항으로 향했다. 차로는 약 45분 거리. 외진 곳이라 대부분 차를 가져왔기에 주차장이 좀 혼란스럽긴 했는데, 외진 곳의 장점인 적당히 주차를 하고 짐을 맡기고 출발선으로 향했다.


출발

이날 아침 기온이 영하 7도였는데, 다행히 해가 떠서 온도가 그렇게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일회용 우비를 입고 5km 정도에서 벗을 생각으로 슬슬 몸을 풀고 사람들이 한바탕 출발하고 난 다음에 여유 있게 출발했다. 어차피 자기와의 싸움이기도 하고 net time이라 괜히 사람들과 부대끼며 초반 페이스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회사 동료는 좀 더 몸을 풀고 간다고 하길래 이어폰 끼고 폰에서 나이키 러닝 클럽 32km 코칭 시작 누르고, 미리 정해둔 빠른 비트의 음악 틀고, 워치에서 달리기 출발 누르고 출발선을 통과했다. 요즘은 정말 준비할 게 많다.


하프 지점

저번 하프 대회에서도 도착한 다음에도 그렇게 크게 부담이 없었어서 풀 코스도 곧 완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32km를 완주하고 나면 가을에 풀코스에 도전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물론 나름 이번 대회를 위해 준비를 많이 하기도 했다.

이 달에 대회 제외하고 마일리지로 약 240km를 달렸고, 작년에 참가했던 러닝 클래스에서 배웠던 팔치기를 실제 폼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서 자세도 많이 안정적으로 바꿨었다. 물론 회복일을 두고 싶지 않아 20km 이상 장거리 훈련을 많이 안 하긴 했지만 체력이 많이 늘었을 테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날씨의 영향인지, 끝없이 이어진 직선 주로의 영향인지, 하프 전에도 조금씩 힘든 징조가 보였다. 원래 급수대에서도 멈추지 않는데 이번엔 잠깐 멈춰서 다리를 풀기도 했다. 그래도 초반에 페이스가 조금 더 빨랐어서 다행히 하프까지는 저번 보다 2~3분 빨랐고 22km까지도 괜찮았다.


하프 이후

그런데 하프 이후부터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원래 510~530으로 달렸었는데 600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억지로 올려서 530 가다가 또 떨어지고, 25km 넘어서부터는 600은커녕 650까지 떨어졌다. 급격한 페이스 저하. 아마도 장거리 훈련을 덜해서 일 수도 있고, 젖산 역치 훈련 같은 걸 안 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웠던 점은... 주변에 걷는, 혹은 멈춰 선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을 보고, '나도 잠깐 걸을까, 멈춰서 풀고 갈까?' 그런 생각이 자꾸 커져갔다. '그래, 다들 그런 거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나를 다그쳐 봤지만, 어쩔 수 없이 두어 번 멈췄다가 다시 뛰고를 반복했다. 하필 맞바람까지 불어와서 컨디션은 더 떨어졌다. 원래 목표가 서브3 였는데, 이러다 걸어서 가는 거 아닌지 걱정되었다. 음악도 전혀 신나지 않아 라디오 팟캐스트로 변경했다.


영하의 날씨에 급수대의 물도 살얼음이 얼었지만 뛰다보니 그랗게 춥진 않았다. 오히려 살에 붙는 언더레이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출발할 때만 해도 싱글렛에 반팔 입은 선수들이 신기해 보였는데 오히려 저게 낫겠단 생각도 들었다.


도착

끝없는 직선 코스는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시각적으로 감이 안 와서 너무 힘들다. 그래서 더 지치게 되고 힘이 빠진다. 이번 코스가 그랬다.


한번도 달려보지 않은 거리라 심적 부담도 있었지만 더 큰 건 신체적 부담이었다. 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관절이 굳어버려 이대로 쭈그려 앉으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만만하게 보면 안됐는데 더 장거리 훈련을 많이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4km 정도 남은 시점에 급수를 하고 힘을 내서 끝까지 밀었다. 언제나 그렇듯 피니시는 멋지게 하고 싶어 결승선 통과할 때는 전력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록은, 3시간 10분. 중하위 기록이다.

어디에 얘기하기 하찮은 기록이고 이대로면 풀코스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수준인데,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3시간 10분 동안 온전히 나만 생각하고, 내 발걸음 하나하나에만 집중한 시간. 나만의 러너스 하이는 충분히 느꼈던 시간이었다. 모든 스위치를 끄고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던 시간.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아마 더 많은 훈련을 하고 더 많은 거리를 달려야 풀코스를 만족스럽게 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래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젊지 않고, 더 이상 무한 체력이 아닌 나이니까. 하지만 그런 나이임에도 이런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리고 풀코스 완주라는 목표가 너무 쉽게 달성되는 것보다 힘겹게 달성되는 게 기분도 더 좋을 것 같다. 이제 다시 훈련을 짜봐야지. 왠지 기대가 된다. 오늘은 쉬었으니 내일은 다시 원래대로 뛰기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한 겨울 마라톤 참가해 보고서는 끝났다. 이미 다음 대회 신청은 완료했다. 다음 대회는 3월 말 하프마라톤이다. 물론 와이프와 상의도 없이 신청했다고 잔소리는 들었지만, 기대된다. 어떻게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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