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막상 해보면 오히려 쉬운 업무 영어
여느 K-직장인처럼 일은 항상 한국인들과 했었다. 물론 외국인 관리자 밑에서 일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어차피 관리자였기 때문에 말하는 게 그렇게 부담이 되지 않았고, 문법 무시 영어를 하며 나름 친하게 잘 지냈었다.
그러다가 부서를 외국인 고객사와 업무를 해야 하는 부서로 옮긴 후 영어는 높은 담벼락이 되었다. 내가 과연 외국 고객사와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잘못 이해해서 혹시나 큰 문제를 일으키면 어쩌지? 그 부서는 대부분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 온 친구들이어서 과연 내가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었다. 두어 달 후 씁쓸한 표정으로 백기를 들고 다른 업무로 전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업무 영어는 이상하게 더 부담스러웠다. 실수하면 곧바로 일이 되고, 책임이 되니까.
아주 젠틀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고, 깊은 영어권 배경지식으로 힙한 표현도 많이 써야 할 것만 같았다. 하필 일주일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고객사와 주간 미팅이 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그 회의를 리딩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세이를 쓰듯 발표 슬라이드에 맞춰서 에세이 수준으로 스크립트를 써보기도 했다.
물론, 이 시도는 실패했다. 왜냐면, 고객과의 회의는 일방적인 보고가 아닌 서로 간의 의사소통 채널이었으니 별의별 질문과 코멘트가 다 나왔다. 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그 대화에서 둥둥 표류하고 있었다. 다행히 초반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부서원이 많이 도와줬지만, 내 자존감은 하염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일상 대화와는 전혀 다른 업무 영어의 세계에 들어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일까? 단순히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했다. 업무 영어는 어떻게 다르게 준비해야 할까?
만약 당신이 해당 업무의 전문가라면 전문용어를 많이 알 것이고, 그 전문용어가 당신의 Power word가 될 것이다. 영어로 돌려 말하는 대신, 그 분야에서 통하는 'Power word'를 던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명심하자. 말이 길어질수록 여러분의 영어 밑천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배관 디자인을 진행한다고 가정할 때, 특정 부분의 열팽창에 따른 흔들림을 막기 위해 보강하는 구조물을 더 구성하고, 그것을 위해 추가로 투자가 필요하다고 하자.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할까?
Let's add additional structure to support this point, as it seems weak against thermal expansion following the additional investment..
대략 직역하면 이 정도 될 것이다. 근데 뭔가 말이 장황하다. 이럴 때 당신의 전문성을 발휘해 보자. 굳이 thermal expansion을 말할게 아니라 'hammering'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리고 어차피 구조물을 설치하면 돈이 들 테니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도 빼고. 그럼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Let's add additional structure here to prevent impact from HAMMERING.
※ Hammering : 유체(주로 물)의 흐름에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파이프라인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급격히 고온의 기체가 유입될 때 배관의 열팽창으로 망치를 두드리는 것처럼 큰 소리와 충격이 발생함.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전문용어를 적극 활용하자. 어차피 당신이 대학 때 공부하고, 입사해서 숱한 야근을 하며 배워온 게 그것 아닌가.
대학교 때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번역본을 보면 처음엔 쉬운데, 나중에 어차피 다시 배워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번역본을 외우고, 단어도 영어로 외우세요."
처음엔 단순히 교수님의 영어 부심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한국 사람이고 당연히 한국어로 배우는 게 편한데. 가뜩이나 이론도 어려운데 영어로 하나하나를 외우려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의미를 깨닫고 있다. 번역본에서는 너무 과도하게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기반으로 외웠을 경우 막상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 이건 뭐지 라는 고민이 생긴다.
예를 들어, 열팽창 계수가 이 부분이 더 높아서 두께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외국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열팽창 계수가 영어로 뭐지?라는 벽이 나타난다.
열팽창 계수는 영어로 Coefficient of Thermal Expansion라고 하고 약자로 CTE라고 한다. 사실 대학 때는 약자에 대해서 큰 신경을 안 쓴다. 난 열팽창 계수라는 것만 알면 문제는 풀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실무상에선, 특히 외국인과 대화할 때는 원어 표현과 약자에 매우 익숙해져야 한다. 특히 실무에서는 약자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결국 여러분이 하는 일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이론이 아닌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 만든 이론이고, 전문가들도 그쪽이 더 많다. 그들 언어를 따라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영어 개념으로 접근해 보고, 실무 하는 입장에서도 영어로 익히는 것을 우선해 보자. 어차피 퇴직할 때까지 계속 배워야 하는 게 엔지니어의 숙명 아닌가.
약간 이율배반적인 말이긴 하지만, 전문 용어도 중요하긴 한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게 전문 사고방식이다.
용어는 ‘이해의 결과물’이다. 단어를 알기 전에, 그 단어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게 먼저다. 예를 들어, 해머링(hammering)은 단순히 파이프에서 소리가 나는 현상이 아니라, 뜨거운 유체가 흐른다 → 파이프가 팽창한다 → 고정된 구조에 응력이 가해진다 → 충격음이 발생한다
이런 물리적 이해가 쌓인 뒤에야 비로소 “해머링”이라는 말이 나왔다. 즉, ‘해머링’을 모른다고 해도 그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면 설명할 수 있고 반대로 용어만 안다고 해서 실제로 이해한 건 아니다. 전문용어를 적극적으로 쓰는 게 좋긴 하지만, 이해를 못 한 상황에서 말하면 오히려 잘못 말하는 경우도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 용어는 시간이 지나면 바뀌지만, 사고방식은 남는다.
기술이나 업계가 바뀌면 용어도 바뀌거나 새로 생기기 때문에 예전엔 쓰이지 않던 AI 관련 용어들이 요즘은 일상처럼 쓰이기도 하는 것처럼 용어는 바뀌고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상을 보고 원인을 추론하고, 해석하고, 해결책을 설계하는 사고의 틀은 바뀌지 않는다. 전문 사고방식을 갖추고 있으면, 용어가 바뀌든 새로운 기술이 나오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일상 영어는 맥락을 통해 의미를 조정하며, 같은 말을 여러 방식으로 변형하는 특징이 있지만, 전문 분야 영어는 정확성과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큰 차이이다. 특히 회의 영어는 논리적인 흐름을 따르면서도, 과도한 단어 사용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유념해 두자.
예를 들어, 이번 주에 예보된 태풍 얘기를 한다면
일상에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 Did you hear? There’s a typhoon coming this weekend.
B: Yeah, I saw it on the news. I hope it doesn’t mess up our plans.
A: Same here. Let’s stay home just in case.
요약하면, 감정 표현, 일상적인 단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고 "typhoon", "coming", "plans" 등 쉬운 단어 위주로 말하게 된다.
하지만 전문 영어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Manager: According to the forecast, Typhoon Bavi is expected to make landfall on Saturday.
Engineer: We should secure all outdoor equipment and check the drainage systems by Friday.
Manager: Agreed. Let’s update the emergency response checklist and notify all departments.
구체적인 단어(landfall, secure, drainage), 실행 중심의 문장이란 특징이 있다. "update the checklist", "notify departments"처럼 행동 지시 중심이고, 불필요한 감정 표현 없이 객관적인 정보 전달이 목적이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보안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 본다면,
일상에서는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람이나 걱정 정도로 느낌 중심으로 말할 것이다.
A: Hey, did you hear? Our system got hacked!
B: Seriously? That sounds bad. Do they know who did it?
A: No idea. I just hope they didn’t steal any personal info.
대신 이게 업무라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IT Manager: We’ve detected a security breach, likely caused by a phishing email.
Security Analyst: The attacker exploited a zero-day vulnerability and gained access to our internal database.
IT Manager: Is the threat contained?
Security Analyst: Yes. We've isolated the compromised server, changed all admin credentials, and initiated a full forensic investigation.
security breach (보안 침해), phishing email (피싱 메일), zero-day vulnerability (제로데이 취약점), internal database (내부 데이터베이스), forensic investigation (디지털 포렌식 조사)처럼 전문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되고 모든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비전문가라면 어렵겠지만, 전문가라면 오히려 이렇게 전문 용어를 적극적으로 말해주는 게 이해가 더 빠르다.
일상 영어는 "느낌"을 말하고, 전문 영어는 "행동"을 정리한다
당신의 업무에 대한 영어 회화책은 없다. 만약 당신이 여행을 목적으로 여행을 한다면, 사실 대충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돈을 내는 입장인데, 적당히 바디랭귀지 써주고 몇 단어 말해 주면 되고, 몇 가지 상황을 암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업무를 위해 영어를 해야 한다면, 당신이 돈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 당신의 전문성을 영어로 끌어내기 위해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 다행히도, 당신은 이미 전문가다. 이제 그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연습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