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딸 두 번째 이야기
---------정혜옹주 1편 ------------------
조선의 옹주라는 명칭은 원래 고려 초기에 내. 외명부에 일정한 제도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현종 때 국왕의 첩에게 귀비(貴妃).숙비(淑妃)등의 호(號)를 주었고, 정종 때 이들을 원주(院主).원비(院妃)와 궁주(宮主)라 하던 것을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개칭하고 정1품의 품계를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후궁(後宮) 소생의 딸과 국왕의 서녀에게 주는 작호이다. 정혜옹주는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의빈 권 씨 사이에 태어난 태종의 5번째 딸이자 서장녀이다.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어머니는 태종이 후궁 제도를 법제화하여 맞아들인 첫 번째 후궁이었다.
의빈 권 씨는 승은을 입어서 맞이한 후궁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명문가의 여식이고 미모도 특출 나고 건강해야 하며 지. 덕. 미를 갖춘 양반가의 여식이었다. 의빈 권 씨의 입궁이 정해지자 원경왕후 민 씨가 투기를 하며 울며 난리 소동이 나서 정식 후궁 책봉받는 가례날에 취소가 되었을 정도였다.
태종은 의빈 권 씨를 위해 따로 거처도 지어주고 연못도 파주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정혜옹주가 유일하다. 태종이 가장 총애했었다는 신빈 신 씨는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몸종 출신으로 태종과의 사이에서 3명의 군(君)과 7명의 옹주(翁主)를 낳은 것과는 대비된다.
태종 이방원의 무서운 면은 신빈 신 씨 소생의 정신옹주를 시집보낼 때 당시 사주팔자가 좋은 총각을 구하기로 하고 점쟁이를 시켜 한양의 도성 내를 가가호호 돌아다녔다. 정치적 풍파에 휩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왕실과의 혼담에 대해 거부감이 심해지자 왕이 국혼을 치르기 위해 점쟁이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당시 종 3품 춘천 도호부사 이속(李續)의 집에도 점쟁이가 왔으나 왕명을 수행 중인 점쟁이에게 아들의 사주를 거짓으로 말해버린다. 이속(李續)의 아들 이근수(李根粹)가 낙점되어 혼담이 오가려 했으나 “몸종의 딸에게 장가가게 된다면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명문가 출신의 의빈 권 씨의 딸인 정혜옹주라면 사돈을 맺을 수 있다고 ” 말해버린 것이다.
이 말이 태종 이방원의 귀에 들어가 이속을 곤장 100대를 내리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전재산을 몰수하고 귀양까지 보내는 것도 모자라 이속 일가를 관노로 격하시키고 이속의 아들 이근수(李根粹) 에겐 금혼령을 내려버린 사건이 태종실록 34권에 수록되어 있다.
다시, 의빈 권 씨와 정혜옹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조선 공녀 출신이자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하던 현인비 권 씨가 의빈 권 씨에게 은 백 냥을 하사했다. 이는 조선시대 때 같은 본관의 안동 권 씨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정혜옹주는 세종 1년(1491년) 의정부 참찬 바신(朴信)의 아들 박종우(朴從愚)에게 출가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