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단체 돌발 데뷔
난 어릴 땐 극 I(내향형)에 가까운, 요즘 아이들처럼 자기주장 뚜렷하고 자존감 높은 타입과는 다른 아이였다. 그랬던 내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성격은 조용하지만 나서야 할 자리에서 괜히 부끄럽다며 빼는 그 어색함이 더 싫었던 것 같다.
이런 모습은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발휘됐다. 《신혼여행 동기들》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남편 대신, 흑장미가 되어 건배주를 들이켰고 분위기 띄우려고 춤추고 노래까지 했으니... 피로연이 끝나고 바로 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속 뒤집힌 건 비밀이다.
2013년쯤인가 남편이 나 몰래 제법 규모가 큰 봉사단체에 가입을 했다. 가입비와 매달 회비도 꽤 나가는 곳이었는데 잔소리 들을까 봐 상의도 없이 몰래 가입한듯했다.(봉사단체라 내가 알았어도 찬성했을 거다.)
그 후 2년쯤 지난 12월 연말
친분이 있는 사장님 부부와 저녁을 먹자고 한다. 꽃단장을 하고 따라 나갔는데 웨딩홀 뷔페였고 가족들과 온 봉사단체 회원들이 모인 대규모 송년회 현장이었다. 남편은 나를 테이블마다 소개를 시켜주었다. 회원들은 나를 "처음 본다"며 반겨주는 반면, 연세가 있으신 사장님들은 의외로 남편을 모르는 분들도 있었다. 역시 조용한 남편, 존재감은 미약했던 거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남편 존재감 상승 모드'가 발동했다.
1차가 끝나고 부부들끼리 2차 노래방으로 이동했다. 1차에선 서먹했지만 2차에서는 다들 술 한 잔씩 들어가니 편안해졌다. 사장님, 사모님들이 남편에게 "아니, 이렇게 예쁜 부인(그땐 어렸으니깐)을 왜 여태 숨겨놨어요?" 하며 농담을 던졌고 남편은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미소를 지었다.(인사치레인 줄도 모르고) 이야기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화장실 도주' 각이었지만 그날은 빼지 않았다.
무대 앞으로 나가서 장윤정 '어머나'와 트로트 음악에 춤을 추었고 그다음 스페이스 A의 '섹시한 남자'로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살짝 섹시한 춤을 곁들이며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데리고 나온 후 남편 앞에서 춤을 췄다. 요즘 가수 '화사'의 신곡 Good Goodbye 뮤비 속 박정민처럼 남편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앞서간 여자? ㅎㅎ
뻘쭘히 서 있는 남편 앞에서 적당한 골반 스텝과 절제된 손놀림으로 춤을 추던 우리의 모습은 술 한 잔씩 들어간 회원들 눈에는 예쁘게 보였을 것이다. 앵콜 함성이 터지고 다른 곡으로 분위기를 다시 띄우자 다른 부부들도 나와서 춤을 추었다. 내가 잠시 자리에 앉자 흥이 많으신 사모님이 옆에 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내가 ㅇㅇ씨한테 졌어요. 오늘 주인공은 ㅇㅇ사장님이네~"라며 응원해 주셨다.
남편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봤고 그 뒤로 난 '팬'까지 생겼다. 사장님들은 남편에게 "다음 모임에도 부인 꼭 모시고 오세요!" 라며 신신당부했다. 그 후로 몇몇 팀들과 친하게 지냈다.
지금 생각하니 철없고 창피하지만 그날만큼은 남편 존재감을 올려준 날이었다. 남편이 즐겁게 웃었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합리화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