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3월

이름을 불러주는 어른이 되다.

by 빛나다온

낯선 시작, 설레는 공기


캘린더 속 숫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학교는 어느새 다른 온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복도엔 낯선 발소리들이 어지럽게 오가고 교실 문 앞에 서 있는 작은 눈동자들엔 두려움과 설렘이 어깨동무한 채 일렁인다.


작년에 돌봄 교실에 다녔던 2학년 아이들 말고는 아직 1학년들은 이름도, 얼굴도, 성격도 모른다.

돌봄 교실 신입생 모집 안내문 한 장. 학년, 반, 이름, 인원수 연락처가 적힌 A4용지가 전부다. 빈칸처럼 남겨진 마음의 여백을 채우는 일 그게 바로 오늘 주어진 첫 번째 과제다.



숫자에서 얼굴로, 종이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그 안내문의 숫자들이 얼굴이 되어 다가온다. 봉사자의 손을 꼭 잡은 채 돌봄 교실로 조심스레 들어오는 아이들. 몸보다 큰 가방을 흔들며 실내화 주머니를 꼭 쥔 아이, 한 걸음마다 고개를 돌려 교실을 탐색하는 아이,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들어와 의자에 앉는 아이.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낯설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낯섦 속에 피어나는 작은 떨림 그건 분명 '기대'라는 이름과 '두려움'이 함께 부르는 첫인사일 것이다.



조심스러운 첫날, 이름을 부르다.


첫날의 교실은 조용하다. 눈치 보는 눈빛들,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망설이는 표정들. 그 사이에서 먼저 다가간다. 아니, 다가가야만 한다.


출석 체크 시간.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간단한 집중 구호부터 알려준다. 선생님이 "집~중"이라고 외치면 아이들은 박수 한 번을 치면 된다.

"집~중 짝!"

"~중 짝!"

"~중 짝!"

세 번쯤 외치면 교실은 어느새 조용해진다. 작은 성취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권지영(가명)~"

"네~~~"

"김정훈(가명)~"

"네~~~"


차례차례 이름을 부르며 명찰을 걸어준다. 이름이 불리는 그 순간 한 아이는 '존재로 불린 존재'가 된다. 세상에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알고 있다.

낯선 세계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일. 그것이 돌봄 선생님의 첫 번째 숙제이며 어쩌면 어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열리는 소리들


며칠이 지나면 교실 풍경은 서서히 변한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그들의 말투와 눈빛을 기억하게 된다.


영어 단어는 외워지지 않아도, 매년 새롭게 만나는 20명 넘는 아이들의 이름은 신기하게 늘 마음에 남는다.


"선생님, 오늘은 뭐 해요?"

"얘가 제 연필 뺏어갔어요!"

"저 오늘 그림 잘 그렸어요! 칭찬해 주세요!"

"오늘 종이접기 해요, 네~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할 말은 끝이 없고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열리고 있다.


때로는 울음도 있다. 서운함도, 실수도, 다툼도.

그럴 때면 옆에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작은 손을 잡아주고 한 명씩 이유를 들어본 후

"괜찮아,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라고 다독여준다.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실망을 주면 안 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이 아이들로 하루를 살아낸다.


3월은 참 신기한 달이다. 봄인데 눈이 오기도 한다. 돌봄 교실에 온 아이들이 하나둘 '내 사람'이 되어가는 시간. 서툰 말투로 마음을 전하는 계절.

매일 이름을 불러주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아, 나는 지금

이 아이들의 두 번째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블록놀이 전쟁!


오후 3시 30분, 자유놀이 시간에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다.

유진(가명): (울먹이며) 선생님..! 민호(가명)가 제 탑 부셨어요!


민호: (손에 블록 쥔 채) 아니야! 내가 그런 거 아냐! 네가 내 거에 손대서 그런 거잖아!


선생님: (다정한 목소리로) 잠깐만~ 유진아, 민호야. 둘 다 천천히 말해볼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얘기해 보자.


유진: 제가 만든 탑 건들지 말랬는데... 민호가 갑자기 손으로 '퍽!' 하고 밀었어요. 그래서 무너졌단 말이에요!(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민호: 아니거든! 유진이가 내 자동차 블록 뺏어갔잖아! 그래서 다시 가지러 갔는데 그게 그 탑이랑 붙어 있어서 손 닿은 거야!


선생님: (끄덕이며) 음... 그러면 유진이는 탑이 무너져 속상했고 민호는 자기 블록을 찾으려다 그런 거구나. 둘 다 속상했겠다.


유진: (입 삐죽 내밀며) 그래도 민호는 미안하단 말 안 했어요...


민호: 나도 기분 나빴는데 왜 나만 미안해야 돼요?


선생님: 그렇지, 우리 민호도 속상했겠지. 그런데 민호야, 실수로라도 친구 탑이 무너지게 됐으면 "미안해"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거야! 유진이 마음이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


민호: (고개 푹 숙이며) 미안해, 유진아.

유진: (조금 웃으며) 나도 미안해.

안 물어보고 가져가서...


선생님: 잘했어, 둘 다! 우리 다음부턴 놀기 전에 이건 내 거야~ 하고 먼저 말하고, 서로 조심해서 쓰자. 그래야 블록 놀이가 더 재밌지!


선생님: 자~ 그러면 이제 블록 탑 다시 만들어볼까? 이번엔 같이 힘 합쳐서 더 멋진 걸로 만들어보자


둘이 사이가 좋아지면 내가 더 으쓱해진다. 그래 중간에서 해결을 잘했어. '난 대단해'하며 나 스스로를 칭찬한다.




'돌봄'이라는 의미


나는 엄마도 아니고, 담임 선생님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아이의 오후를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다. 가끔은 손을 잡아주고 가끔은 혼을 내고 가끔은 조용히 안아주는 존재. 아마 그게 '돌봄'이라는 이름이 가진 진짜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불러주고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일.

누군가의 작은 세계에 조용히 들어가 함께 숨 쉬어주는 일. 그렇게 3월 또 한 번의 봄을 이곳 아이들과 함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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