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에 흰 드레스를 입은 무표정한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절벽 밑으로 아주 느리게 추락했다. 떨어지는 동안 흰 드레스에 꽃이 피듯 붉은 피가 서서히 물들었다. 엄마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보았다.
엠마는 절망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엄마를 애타게 불렀다.
“엄마~! 안~돼! 제발!!”
꿈이었다. 엠마가 어렸을 때부터 꾸었던 반복되는 악몽.
침대 위, 번뜩 눈을 뜬 엠마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엠마는 두려움에 떨었다. 숨이 막힐 듯한 공포였다. 아직도 엠마는 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꿈속으로 다시 들어가 엄마를 살리고 싶었다. 꿈과 현실이 모호했다. 그러나 이내, 엠마는 깨달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 괜찮아. 괜찮아. 진정해.꿈이야. 지독한 악몽이라고. 엄마는 며칠 전에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잖아. 이 세상에 안 계셔.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엠마는 자신을 위로했다.
이렇게 엠마가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쌀쌀한 기운이 맴도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세상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이 지독한 고요함 속에서 엠마는 침대에서 한 동안은 숨을 거칠게 쉬며 자신의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얼마나 놀란 것인지 심장의 박동소리가 귀속에서 한 동안은 멈추지 않았다.
두근두근두근....
엠마는 가만히 누워 심장이 이 요동치는 감정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5분이 지났을까? 다행히 엠마는 진정이 됐다.
그리고 엠마의 뺨에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엠마에게는 이따금씩 반복되는 악몽이 있는 잠의 세계와 깨어있는 현실세계가 모두 싫었다. 특히 밤에 잠이 드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낮에 몸을 굴려가며 피곤하게 일을 했어도 불면증이 심했다. 때론 잠자리에 들어 잠들기 전에는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발 나 좀 잠들게 해 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엄마를 잃기 전에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를 보내 주어야 한다는 극도의 불안감 때문에 지금은 엄마를 잃은 후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잠시 후, 해가 떠올라 창문으로 햇살이 손을 뻗어 기지개를 했다. 잠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엠마는 방에서 나와서 거실로 향했다. 그러다 거실복도에 있는 커다란 전신거울에 잠시 멈춰 섰다. 엠마는 긴 진갈색 곱슬머리에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가졌다. 동그란 쌍꺼풀이 짙은 눈과 짙은 눈썹, 조그맣고 오뚝한 코, 작지만 통통한 입술은 엠마의 나이를 더욱더 어려 보이게 했다. 엠마는 옛날에는 튼튼하고 다부진 몸을 가졌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후 잘 먹지 않아 피죽도 먹지 못한 것처럼 깡말랐다. 엠마는 올해 어엿한 성인인 스무 살이다. 남이 보기엔 예쁘지만, 지금 이 순간 엠마가 보는 거울 속의 엠마는 슬픔덩어리의 한 인간일 뿐이다. 엠마는 엄마와 똑 닮은 자신의 외모를 보며 거울을 한 번 만져보았다. 그리고 이내 또 눈물이 또 그르르르......
엠마는 이렇게 자꾸만 시시때때로 울어대서 눈이 부어있었다.
엠마는 눈물도 닦을 겸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거울 속의 새빨간 눈이 엠마를 먼저 맞이했다. 그리고 한 발을 욕조 속에 먼저 딛었는데 살가죽만 남은 몸이 휘청거렸다. 당최 죽지 않을 만큼만 먹어서 하루가 다르게 엠마는 말라갔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마른 듯했다. 엠마가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감자,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빠졌다. 머리숱이 예전보다 많이 없어져서 머릿속이 다 보였다. 엄지발톱은 무좀균이 올라와 둥그렇게 말려 살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지다 보니 엠마는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불편했다. 꼬리뼈는 심하게 튀어나왔고 엉덩이에는 살이 거의 없었다. 전에 입던 옷도 다 헐렁해져서 제대로 맞는 옷이 없었다. 그래도 엠마는 개의치 않았다.
엠마는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틀어 좀 더 물을 따뜻하게 조정했다.
쏴아아 아아~~
물이 약간은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정한 후에,
엠마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긴장을 늦추고 다리를 구부려 주저앉았다. 머리 위로 샤워물이 쏟아져 내렸다.
머리카락은 기가 죽어 축 늘어지고 엠마의 온몸도 다 같이 늘어졌다. 엠마는 욕조의 마개를 꽂았다.
흘러내리던 물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리니 이내 욕조 속에서 빠르게 배회를 하기 시작했다. 엠마가 고개를 숙여 얌전히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받아들이는 동안 세상이 고요해졌다. 엠마는 아주 느리게 욕조에 지친 마음을 안고 누었다. 조그만 몸이 욕조 안에서 일렁거렸다. 물은 이내 차올라 엠마의 배꼽 위를 서성거렸다. 엠마는 물속에서 중력의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주를 떠다니는 것 같은 가벼움이 엠마를 평온 속에 놓이게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행히 엠마는 좀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따스한 엄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엠마의 동네에는 성질이 고약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두 형제가 있었다. 엠마는 놀 친구가 없어서 가끔 같이 놀기도 했는데, 두 형제 중에 형이 웬일로 절대로 태워주지 않던 자전거를 타라고 했다. 엠마는 신이 나서 자전거에 앉았다. 그런데 앉자마자 형은 자전거가 고장이 났다면서 엠마가 고장을 냈다고 엠마에게 윽박지르고는 자신의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가버렸다. 엠마는 집으로 울면서 달려가 엄마에게 말도 못 하고 집 안에 벽장 속에 숨었다. 이내 형의 엄마가 엠마의 집에 달려와 자전거값을 물어내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는 소리를 했다. 그때 엠마는 분명히 엄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애가 그러는 거 봤어요? 우리 애가 앉자마자 자전거가 고장이 났다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댁의 애가 말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요? 우리 애는 절대로 댁의 아이의 자전거를 고장 내지 않았어요!”
엄마는 엠마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엠마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의 못된 성품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현명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자전거를 고장 내뜨리고 엄마에게 혼날까 봐 엠마에게 뒤집어 씌울 작정이었다. 나중에 그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그날의 엄마는 아직도 엠마의 머릿속에 살아있다.
엠마는 엄마와 이런 추억을 꼽씹으면서 옷을 천천히 입고 욕실을 나왔다. 상쾌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엠마의 뱃속에서 꼬르르륵 소리가 요동을 쳤다. 엠마는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엌으로 가다가 엠마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독서가 취미인 엠마는 책이 가득한, 엄마가 살아생전 엠마를 위해 만들어 준 이 서재가 정말로 맘에 들었다. 책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엠마의 꿈은 어릴 적부터 동화책 작가이다.
엠마는 서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인 ‘장난꾸러기, 브르나의 여행’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엠마에게는 애착인형과도 같았다. 엠마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가 하루에도 여러 번 읽어주었던 책이어서... 엠마는 이 책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내용을 토씨하나 안 빼고 외우기도 했다. 브르나가 형제들과 엄마과 함께 도서관, 시장, 놀이터, 장난감가게 등등을 다니면서 장난을 치는 이야기인데, 브르나의 예기치 못한 장난에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엠마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삽화가 맘에 들었다. 엄마도 이 책을 또한 엠마만큼 좋아하곤 했다. 엄마와의 연결고리와 같았던 이 책을 볼 때마다 엠마는 기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오늘처럼 엄마 꿈을 꾼 날은 어김없이 엠마는 이 책을 항상 일어나자마자 봤다. 책을 다 읽은 후, 엠마는 다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엠마는 우선 볶은 보리와 옥수수알을 주전자에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빠르게 식탁 위 바구니에 들어 있는 새빨간 사과 하나를 집어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상큼한 사과향이 입 안을 채웠다.
‘그래도 나는 살겠다고 이렇게 먹는구나. 이 사과는 엄마가 없는 이 세상에서도 계속 존재하네. 엄마는 사과를 이제 모르겠지. 내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그림 속에 어디에도 엄마의 모습은 볼 수가 없어. 제일 맛있어 보인다며 바구니 속에 사과들 중에 하나를 골라서 내게 주었던 엄마를... 죽음이라는 것이 이 그림들 속에 엄마만 오려내기를 해버렸어.’ 엠마의 눈에서 슬픈 북받치는 감정이 들자마자 또 뜨거운 눈물이 주책없이 주르륵 흘렀다. 엠마는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멍하니 흐려진 시야속에 뭉그러진 사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는 안돼! 엄마도 원치 않아!’
엠마는 크게 숨을 내쉬고, 눈을 꼭 감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하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언가 희망찬 내일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은 있다. 더 이상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엠마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