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떼의 습격
피이이시이익~~~~
주전자에서 소리가 났다. 엠마는 차가 우러나기를 좀 더 기다렸다가 찬장 속에서 엠마가 가장 좋아하는 망그러진 곰캐릭터가 그려진 컵을 꺼냈다. 컵에 차를 따른 후, 엠마는 얼음 몇 조각을 너무 뜨거운 차에 넣었다. 입에 델까 봐 조심스럽게 입을 컵에 가져가서 조금만 마셨다. 온도는 딱 적당했다. 차는 엠마의 몸을 녹여주었다.
다시 식탁으로 다가가 앉아서 먹다 남은 사과를 먹으려다가 엠마는 배가 부르기에 더 이상은 먹지 않았다.
그저 차만 조금씩 마실 뿐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시월이지만 덥더니 이젠 제법 쌀쌀해졌다. 엠마의 부엌에 있는 커다란 통유리로 본 바깥세상은 갈색, 진갈색, 노란색, 벽돌색, 초록색 등등의 나뭇잎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을에는 낙엽이 이렇게도 많이 떨어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겹겹이 쌓여 있는 낙엽이 새롭다.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나 이제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난 아직도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오늘부터 달라지기로 했으니까. 이젠 슬슬 은둔생활을 청산해 볼까 해.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은 되지만, 내가 좋아했던 소소한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면서 시작해 보는 거야. 음... 우선, 밖에 나가서 얼굴에 인형처럼 호기심에 어린 반짝이는 검은콩 두 개 박은, 지나가는 귀여운 하얀 솜뭉치 강아지들 좀 구경하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장사하기 시작하는 집 근처 계란빵트럭에 가서, 갓 나온 뜨끈한 계란빵 종이컵에 담아서 조금씩 베어 먹을 거야. 공원 근처로 가는 가로수길 중간에 있는 벤치에, 동네 아주머니와 둘이 오손도손 마늘을 까면서 장사를 하시던 그 친절한 요구르트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엄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탄 몸이 불편한 여자 아이. 하교 시간쯤이 되면 늘 마주쳤었는데 그 환한 미소. 다시 보고 싶다. 아차차!그 애도 있었어. 잘생긴 다운증후군 중학생 남자아이.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댄스를 추던 그 아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나란히 웃으면서 걸어가는 안아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풋풋한 커플들은 또 얼마나 예뻤다구. 아 맞다! 무엇보다도 도서관에 간지가 너무 오래됐어. 어깨가 빠질 정도로 책을 빌릴 수 있는 한도까지 다 빌리고 이 도서관 저 도서관 다니다 보면 하루가 다 갈 정도였지.
이렇게 골똘히 연상하듯 생각해 보니 일상에서 내가 마주쳤던 행복들이 떠올라. 지금 보고 있는 낙엽만큼이나 아름다운 생명체와 무생물체가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미안해! 그동안 내가 참 무심했었지. 마침 먹을 것도 다 떨어져서 장도 봐야 하는데, 어디 보자. 10월 25일 넷째 주 토요일 장 서는 날이네. 좋았어! 그럼 이 차를 다 마시고 난 후 한 번 나가보자. 그런데 나 진짜 나갈 수 있겠지? 곧 귀찮아지면 안 되는데.'
엠마의 마음은 이미 밖에 나갔지만 실제로는 나갈 자신이 없었다. 단지 상상산책만했다. 그리고 곧 창밖의 풍경에서 엠마의 시선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동생 이안이 어제 두고 간 타로카드로 꽂혔다.
엠마보다 한 살이 어린 이안은 올해 시내 한복판에 목이 좋은 자리에 타로가게를 열었다. 이안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라며 좋아했다. 운이 좋게도 장사도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설 정도로 잘되어가고 있다. 이안에게 타로를 보려면 예약은 필수가 되었다. 엠마도 이안이 타로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워 웬만큼은 타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안만큼은 절대 아니다. 엠마는 이안에게서 타로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 위로가 된다.
그런 위로가 필요했을까? 찻잔을 핫팩 삼아 두 손으로 꼭 감싼 엠마는 한 손을 타로카드에 이끌리듯 뻗었다. 한 손으로 타로카드를 펼치고는 오늘의 운세를 점치기 위해 질문에 집중을 한 후, 한 장만 뽑았다. 타워카드가 나왔다.
타워 카드는 타로 덱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카드 중 하나로, 급격한 변화와 예기치 않은 사건을 나타냅니다. 이 카드는 주로 상황의 불안정성, 혼란, 붕괴, 혹은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타워 카드는 번개가 치는 탑을 묘사하며,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갑작스러운 변화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나타내며, 종종 극적이고 불안한 상황을 시사합니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인생에서의 급격한 변화나 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출처 네이버-
'뭐지?'
'무언가 갑작스러운 변화가 있으려나?'
엠마는 샤워 후에 이제는 슬픔에서 벗어나기로 했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심경의 변화겠네.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는 구수한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내 컵바닥에 그려진 트림을 하고 있는 망그러진 곰 캐릭터가 보였다.
'음, 귀여워!'
몸이 따뜻한 차에 녹아내리자 엠마는 슬슬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수술하기 전에 마취약이 링거를 타고 내려와 멀쩡했던 정신을 순식간에 잃게 만드는 그것과 같았다. 이렇게 피곤이 미친 듯이 밀려올 때쯤,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치더니 세찬 비가 바늘처럼 매섭게 떨어졌다.
엠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한 번,
"우르릉 쾅쾅"
부엌 쪽 창문 밖에 거리에 가로수가 번개에 맞아 쓰러져 엠마의 넓은 창을 부수었다. 엠마는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두 손으로 얼굴 쪽을 막았다. 유리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튀었지만, 다행히 엠마는 다치지는 않았다.
차디찬 비바람이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까마귀 네 마리가 그 깨진 틈으로 같이 들어왔다. 이 모든 일이 단지 몇 초만에 일어났다.
"까악 까악~~"
고개를 들어 엠마는 남에 집에 불쑥 쳐들어온 불청객들을 두려움에 쳐다보았다. 까마귀가 저리도 컸었나?
"까아악~~~"
이번에는 엠마가 소리를 질렀다.
엠마는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 까마귀 중 한 마리는 분명 흰색이었다.
"슈욱 슈우욱 저리 가!!!"
용기를 내어 물리쳐 보았다.
까마귀들이 꿈쩍을 하지 않고 대범하게 엠마를 공격하려는 듯이 달려들었다.
엠마는 마침 근처에 있던 핸드폰을 쥐고 간신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걸어주십시오. 뚜뚜뚜..."
'바보.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시잖아!'
엠마가 힘든 일을 겪을 때면 늘 엠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거나 위로를 받곤 했다. 이럴 때 생각나는 건 엄마였다. 엠마는 이런 자신이 어이없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래, 119에 전화해야지!'
그런데 엠마가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려고 할 때,
까마귀 떼는 칼을 찬 아주 건장한 20대 후반의 4명의 젊은 이들로 변했다. 이들은 회색과 푸른색이 잘 어우러진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라텍스 재질의 스파이더맨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자세히 보니 티타늄과 같은 단단한 재질로 된 기사의 갑옷과 같은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 엠마는 생전 처음 봤다. 그리고 가슴에는 까마귀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오직 단 한 명만 흰 까마귀문양이고 나머지는 모두 검은 까마귀의 문양이었다.
엠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핸드폰을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새를 놓칠세라 그중에 흰 까마귀문양의 옷을 입은 대장인 듯한 남자가 핸드폰을 밟아 부수어 뜨리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대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안 되지! 떽! 음하하하!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지? 이름은 들어봤나 모르겠는데 우리는 악명높기로 유명한 일리아에서 온 코니기사단이야! 우리의 여왕님이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셨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했는데 별 볼 일 없군. 넌 그냥 풋내기잖아? 괜한 걱정을 했어. 좀 뭐랄까? 너무 시시한데?”
"하하하! 겁에 질린 얼굴 좀 봐!"
"얼른 일을 끝내고 주점에 가서 맥주나 마시자!"
"도도도...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번지수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제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나요? 사람... 완전히 잘못 보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까마귀에서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는..." 엠마는 거의 실신하다시피 겁에 질려서 간신히 더듬더듬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엠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중 하나가 성큼성큼 엠마에게 다가와 이제 칼집 끝으로 엠마의 머리를 때려 엠마를 기절시켰다.
잃어가는 엠마의 정신 속에서 엠마는 병실에 혼자 우뚝 서서 창밖을 보던 머리를 다 밀어버린 엄마를 떠올렸다. 휠체어 앞에 난간에 의지하여 서 있었던 엄마의 뒷모습. 찬란한 저녁노을이 엄마를 따스히 보듬어 주고 있는 그날. 죽음에서 벗어나 우리에게로 힘차게 일어선 엄마의 저 두 발이 긴 그림자를 붙이고 당당히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던 그때. 엠마는 희망에 찼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엄마는 그날 엠마에게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 한 번 휠체어에서 일어나 봤어. 노을이 정말 아름답다!"
그 순간, 벅찬 감정을 주체 못 한 엠마와 엄마는 부둥켜안고 울었었다. 수술 후 엄마가 처음으로 일어섰던 그날을 엠마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엠마에게 지금 닥친 시련을 엄마처럼 이겨 낼 수 있다고 엠마의 무의식이 말하고 있는 듯했다.
곧 기사들 중에 몸집이 큰 기사가 엠마를 어깨에 둘러메었고, 흰 까마귀였던 대장이 오른손 반지에 박힌 루비로 레이저를 쏘아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손으로 커튼을 치듯이 치니 배경이 걷어지면서 다른 세계가 나왔다.
그때 뒤로 처져있던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장님! 죄송한데요, 제가 화장실이 급해졌어요.”
“아~! 또야? 갔다 와! 우린 먼저 출발한다. 여기 문은 열어 둘께! 십분 뒤에 자동으로 닫히니까 빨리 일 보고 따라와!”
대장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나머지기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화장실이 급하다던 거짓말쟁이 기사는 엠마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훔쳐 갈 물건이 없나 살폈다. 집은 여기저기 쓰레기들로 차 있었다. 안방을 들어가 보니 침대고 바닥이고 옷이 쌓여 걸을 수가 없었다. 기사는 밀림 속의 덩굴을 헤쳐가듯이 지근지근 옷을 밟아가며 보석상자를 침대 옆 탁자에서 찾았다. 상자를 열어 얼른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 보석을 넣었다. 거기에는 엠마의 엄마의 유물인 초록반지도 있었다. 초록반지가 잠깐 빛을 내었다.
기사는 반지를 빠르게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엠마의 집을 나와 일행과 합류했다.
엠마는 이런 식으로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엠마에게는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인데, 기사는 오늘 한몫을 단단히 잡아서 기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