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완전히 혼자야!'
엠마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남처럼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던 이혼한 아빠의 부고를 들었다.
이안의 고귀한 영혼의 상당한 부분을 누군가가 삽을 들고 푸욱 파서 가져가버린 느낌이었다. 이안은 속이 텅 빈 껍데기처럼 부스러 질 것만 같았다. 엠마가 사라진 날, 이안은 온 식구가 따뜻한 온기를 나누었던 그 집에서 사악한 기운을 느꼈다. 자신을 감싸주었던 자궁과 같은 행복감을 주었던 집이었다.그런데 그 감정은 지난 과거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부엌의 바닥과 식탁 위는 깨진 창문으로 비가 마구 들이닥쳐서 빗물로 흥건했고 유리파편들로 가득했다.
먹다 남은 사과와 엠마가 평소 애지중지하는 망그러진곰 컵이 그대로 바닥에 깨져 있었다.
경찰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가로수가 번개에 맞으면서 집의 창문 쪽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그런데 엠마가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해서는 미궁이라고 했다. 경찰은 엠마가 밖으로 나간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엠마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안은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엠마를 찾기가 힘들거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납치인가? 아니 그럴수는 없다. 나간 흔적이 없으니까. 참을 수 없는 막막함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디로 갔나, 누나는? 가게에서 자지만 않았어도 막을 수 있었던 일일텐데.'
어느 날 찾아온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하는 이의 느린 죽음이라는 못된 것이 이안을 강한 중력으로 한 없이 밑으로 끌어당겨 망가뜨리더니, 이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이안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아빠마저 돌아가셨다.
'허락도 없이! 감히! 왜? 누가? 이렇게 19살밖에 안 된 나의 삶을 지옥으로 쳐 넣은 거야?'
이안은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불행한 상황에 화가 나서 타로 가게의 테이블을 한 번 세게 주먹으로 쳤다.
"쿠우우우웅~~~"
이안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졌다. 이안은 고개를 떨군 채, 시간이 멈춰버린 것 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흐느낌 속에 어깨만 위아래로 움직일 뿐... 이렇게 소리 없이 커다란 슬픔에 지배당한 채 한동안은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엠마와 이안의 아빠는 가족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술만 마시면 온 집안의 물건들을 때려 부수어서 집안살림이 성한 게 없었다. 그리고 엄마를 한 달에 한 번씩은 심하게 때렸다. 엄마는 그 몸으로 일도 하고 집안 살림도 했다. 자식을 위해 희생했던 엄마였기에 이안은 그런 엄마가 더욱더 애틋했다. 결국 다행히도 엄마는 이안이 7살 때 아빠와 이혼을 했다. 정말 그때 이후로 행복했다.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아빠가 재밌게 보는지 아닌 지 눈치를 볼 만큼 아빠의 기분을 살피던 이안은 좋아하는 코미디프로그램도 맘 놓고 웃으면서 볼 수가 있었다. 아빠가 웃으면 그때 웃었었는데 이젠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콧노래소리를 전보다 더 자주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엄마의 몸에 난 상처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엄마가 가장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엄마가 차린 책방은 장사가 잘 되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고 공부만 계속하는 엠마와는 달리 이안은 빠르게 사회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엄마에게 지워진 그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본인이 가장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이안은 어린 나이에 타로가게를 차릴 만큼 자수성가했다.
"쾅! 쾅!" 이안은 두 어 번 다시 빠르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이안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중얼중얼 댔다.
"엄마..."
"누나..."
"아빠..."
그리고는 이안은 옛 일을 떠올렸다.
아빠에 대한 흐릿한 핏빛 가득한 두려움의 기억과 엄마에 대한 청초하고 애틋한 사랑,
누나에 대한 연민과 동지애가 느껴졌던 이안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그때를...
아빠는 아빠의 정신세계 속에 악마들이 미쳐 날뛰었던 그 추운 엄동설한의 그 날밤에도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는 엄마를 향한 원망과 구타가 시작되었다. 종종 아빠는 부엌칼을 들고 엄마를 짓누른 상태에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어린 이안은 불안했다.
엄마의 지시대로 부엌 커튼 뒤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엠마와 이안은 숨어 있었다.
공포에 질려 뻣뻣하게 죽은 사람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았던 엠마는 아빠가 엄마를 오늘도 칼로 위협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이안은,
"누나, 걱정하지 마! 나 바지 속에 칼 있어. 아빠가 엄마를 어떻게는 못해. 봐봐! 여기 이렇게. 나 잘했지?"
이안의 왼쪽 내복바지 속에 과도가 세워져 숨겨져 있었다.
이제 여섯 살 난 이안의 하얗고 고운 다리에는 칼날에 베어진 자국이, 빨간 줄이 보였다.
한바탕 아빠의 광기 어린 의식이 끝난 후, 아빠는 제 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이안과 엠마도 자리에 누워 잠들기 시작했다. 그때 잠결에 이안은 들었다. 엄마가 이안의 내복바지 속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했던 말을...
"불쌍한 내 새끼....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한다."
엄마의 뜨거운 눈물이 상처 위로 똑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