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_The Ghost in My Mind #17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곱씹어 본다. 그렇게 간절기 휴게소에서 만난 우리의 관계는 고속도로에 진입해 얼마 달리지 못해 파국을 맞았다. 고속도로라는 예측불가능한 위험 요소가 숨어 있는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불안을 경험할 때마다 각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의 방어 전략을 사용했다. 현존하는 불안 요인이 적었던 휴게소에서 우리는 날을 세울 필요가 적었고, 간절기라는 선선한 바람 덕분에 맹렬히 화낼 일도, 얼음처럼 마음의 빗장을 닫을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점점 뜨거운 여름,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리기 시작한 우리는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치열한 여름의 고속도로에서 자기의 속도로 달리는 우리가 좀 더 ‘나’에 더 가까운 모습일 수도 있다. 특히나 사회적인 관계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말했듯이, 간절기 휴게소에서 만나 나름의 끈적한 친밀감을 나누었기 때문에 막상 도로를 달리자 드러난 그 차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삶의 태도를, 가치관을, 대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X는 통제로 불안에 맞섰고, 나는 회피로 불안에 대처했다. 즉, X와 나의 만남은 통제와 회피의 치열한 관계의 역동이었다. X는 불안할수록 통제를 강화했고, 나는 불안할수록 침묵으로 피했다.
통제(control)는 외부의 상황을 조정해서 불안을 감소시키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주도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타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주도권을 쥐려고 타인의 선택이나 상황을 ‘배려’, ‘효율’, ‘경험이 많으니까’ 등으로 포장하여 조정한다. 이는 결국 자신이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혼란이나 무질서, 무력감 등의 공포나 불안을 자기 방식에 맞춤으로써 해소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반면, 회피(avoidance)는 말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 자신의 감정이나 갈등으로부터 도망침으로써 불안에 대응한다. 말을 하고 난 후 벌어질 갈등이나 거절, 실망 등을 경험하는 것이 불안하여 감정을 억누르거나 말하지 않고 모른 척, 참는 척, 괜찮은 척 회피한다. 이러한 회피는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자존감이 다치거나 관계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X는 불안에 휩싸이면 자신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상황을 조종하거나 타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상황을 조율함으로써 통제했다. 내가 바빠서 여행을 갈 여력이 없다고 하면, 가능한 방법을 잔뜩 알려주며 이렇게 해도 힘드냐고 재차 물어보고 애원하여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내가 관심이 없다고 하면 시간을 두고 계속 지켜보다가, 결국 내 불안의 틈을 이용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같은 학원에서 일하도록 유인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 도움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결국 자신의 미래 계획을 도와줄 일원으로 만들었다. X가 처음부터 나를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나에게 어세스타를 소개해 주었을 때는 그 말과 표정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충분히 느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변질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오며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통제를 계속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방식이 생각보다 사회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왔기 때문에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전에 동생들과 학원을 오래 운영하였기에 통제를 해도 더 쉽게 용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피드백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한 X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 내적 불안은 더 커졌고, 내가 X의 계획에서 핵심 멤버가 되어감에 따라 더욱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기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관계는 절대로 한쪽에 의해 발전되지 않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처럼,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양쪽의 기여도가 존재한다. 나는 불안을 느낄수록 피한다. 나는 X가 어디를 가자고 조르는 것이 힘들었다. 지쳐서 집에서 쉬고 싶은데, 에너지가 높은 X는 어디에 있는 카페를 가자고, 여행을 가자고 불쑥 전화를 해서 졸랐다. 나는 힘들다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내 생각보다 X는 집요하게 계속 말했고 결국 나는 끝까지 피하다가 승낙하거나 정색하며 거절했다. 또한 둘 사이에서 불편감이 감지되면 그때 적절히 내 의사를 말하고 조정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참았다. 불편한데 참았다. 오늘만 넘기면 괜찮을 거야 싶었다. 친하니까, 언니니까, 바쁘니까 등등 여러 이유와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어갔다. 말한 후에 발생하는 말다툼도 싸움도 지치고 힘들고 귀찮았다. 하지만 나의 도피는 결국 끝없는 추격에 항복을 선언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했다. 피해도 결국 느껴야 하는 씁쓸한 감정이었다. 내가 회피하지 않고 말해서 상황을 계속 조절해 나갔다면 지금 상황이 달랐을까?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다.
통제와 회피가 만나면 ‘언제까지 회피하는 사람이 참을 수 있는가’가 관계의 유효 기간이 되어버린다. 통제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상황 조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견디지 못해, 결국 상대를 조종하거나 설득하고 혹은 짜증을 내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회피하는 사람은 갈등을 피하려고 문제를 덮거나 참고 넘기려 하기 때문에, 문제 상황을 다루지 않고 ‘내가 참으면 되겠지’ 식으로 상황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다 내면의 피로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발하거나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통제하는 사람은 이 관계의 파국이 회피하는 사람의 책임처럼 느껴져 더 억울해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능하거나 나약했다고 자책하고 수치심을 느낀다. 이것이 끈끈함으로 포장된 우리 관계 역동의 벌거벗은 본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