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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주의보!! 70km 유격행군

by 담담이


지옥의 유격훈련 시작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혹독한 훈련은 단연 두 가지다.
유격훈련과 공수기본훈련.

그중에서도 유격훈련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일반 병사들도 일정 수준 경험하기 때문인데, 물론 강도나 기간은 생도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통상 2주, 간소화되면 1주 정도 진행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지옥이 압축되어 있다.




적진에서 살아남기 프로젝트

유격훈련의 훈련목적은 명확하다. “전쟁이 터졌고, 나는 포로가 되었다.” 훈련생은 그 가정 아래서 적진 한복판에서 고문과 포로생활, 수색, 추격을 견뎌야 하고, 끝내 탈출에 성공해야 한다.


핵심은 두 가지다.

포로로서의 각종 고문과 고통을 견뎌내는 훈련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도망치는 생존 훈련


그래서 쉬울 수가 없다.
유격훈련이 진짜 힘든 이유는 단순히 고강도 훈련 때문이 아니다.
더럽고, 배고프고, 불편한 상태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진에 있는데 샤워나 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는 그 1~2주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러운 상태였다.




아슬아슬한 야영생활

입소하자마자 첫 과제는 텐트 설치였다.

앞으로 1~2주간 생도의 삶은 오롯이 텐트 안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처음엔 나름 캠핑 분위기가 나겠다 싶었다.
하지만 군용 텐트는 그런 낭만 따윈 없다.

두 명이 겨우 몸을 눕히면, 다리를 쭉 펴기도 어려운 공간.
뒤척이기도 버거운 그 좁은 공간이, 우리의 침실이었다.

그래도 처음 며칠은 버틸 만했다.
산속에서 동기들과 야영하는 느낌이 오히려 짜릿했다.
"이래서 캠핑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물론 그 생각은 곧, 영원히 사라졌다.




고난의 시작 - 호우주의보 발령

입소 3~4일째,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
하늘은 가차 없이 비를 퍼부었고, 텐트 안팎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비가 오면 짐은 텐트에 넣으라 배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많은 짐을 다 넣으면 우린 어디서 자란 말인가?

훈련 중 비가 오면, 누가 대신 챙겨주기라도 하나?
답 없는 상황이었다.

팬티, 수건, 전투복, 심지어 전투화까지 모조리 젖었다.

전투화는 훈련생에겐 생명이었는데, 그 생명은 침수되고 말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새벽 4시, 대피령이 떨어졌다

폭우는 멈출 줄 몰랐다.
몇몇 텐트는 침수되기 시작했고, 거치해둔 짐들은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결국 새벽 4시, 훈련대장의 전 병력 대피 명령이 떨어졌다.

수백 명이 “대피하라!”고 외치며 산을 내려왔다.
비에 젖은 생도들은 정신없이 텐트를 버리고 몸만 간신히 보전한 채 내려왔고,
그 와중에 우비조차 못 찾은 동기들은 비명을 지르며 산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느꼈다.
이건 훈련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훈련이 우리를 힘들게 한 게 아니었다.
날씨 하나가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리고, 지옥의 마지막 장. 유격행군

그 악몽이 지나고, 마지막 훈련이 시작됐다.

이름하여 70km 도피 및 탈출 행군.

정확한 무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 25kg은 넘는 군장을 메고, 20시간 안에 70km를 완주해야 했다.
도로가 아닌 산악지형에서.

이미 며칠째 비에 젖은 장비들과 침수된 군화로 인해 상황은 최악이었다.

폭우는 계속됐고, 모든 짐과 군화는 다시 젖었다라는 표현이 무색할정도로 흠뻑 물을 흡수했다.
군화 안은 마치 작은 수족관 같았고,
그 속에 내 발을 넣은 채 70km를 걸어야 했다.

물을 빼봤자 소용없었다.
신발 안은 계속 물을 머금었고,
걷다 보면 발가락 사이로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자 한기가 몰려왔다.

이미 젖은 옷은 체온을 순식간에 빼앗아갔다.
저체온증.
살이 떨리고, 근육이 굳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옥이었다

발엔 물집이 터졌고,
축축한 훈련복은 피부에 염증을 일으켰다.
온몸이 긁혀 붉게 부어올랐고,
가슴속에선 수만 번의 욕이 맴돌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통이 너무 커서 울 힘도 없었다.
정신은 이미 나가 있었다.
그저 걸었다.




교훈? 난 그런거 모른다. 다만 버텼을 뿐

누군가가 “그 훈련에서 뭐 배웠어?”라고 물어본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교훈은 무슨.. 죽을뻔 했구만"


솔직히 말해, 누군가에게 공유할만한 특별한 교훈은 없었다.
감동도, 깨달음도 없었다.
그냥, 지독한 고통의 기억만 남았다.


하지만 단 하나.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70km도 걸었으니, 이제 20~30km는 산책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동기들과의 평생 술안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평생의 술안주인데 2주 고통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난 아직도 모르겠다 하하..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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