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춘기, 아버지의 고통에서 길을 묻다.
왜 나는 아버지의 고통 앞에서 화가 났을까?
아버지의 입원 소식은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언제나 건강하실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컸었나 보다.'
담낭이 터져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계신다는 말에 병원을 수소문해 빠르게 입원을 하셨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면회는 어려웠기에 답답함이 커졌다. 다행히 미국에서 남편 치과치료 때문에 잠시 귀국한 여동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서 감사했다.
터진 담낭 주위의 고름을 제거하는 시술을 마치시고 일반 병실로 옮겨서야 잠시 뵙게 되었다. 아버지는 수척해진 모습으로 "너무 아프다"는 말만 되뇌셨다. 웬만한 고통에는 끄떡도 하지 않던 분이라 고통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담낭 수술 후기를 보면 다른 수술 후유증 보다 훨씬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 화는 아버지의 아픔을 보며 언젠가 쇠약해질 나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효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식이 제 역할을 못 해 아버지가 아프다'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 미리 화를 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감정의 근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통은 오직 당사자 만이 알 수 있는 깊이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성은 왜 때로 귀찮음이 될까?
아버지에게 수술에 대한 두려움, 입에 맞지 않는 병원밥, 낯선 환경에서의 구속감, 초라해진 모습에 대한 자존감 하락, 젊은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열등감, 그리고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대한 한심함까지. 이 모든 것은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생과일을 직접 간 주스, 컵 과일, 홍삼 스틱, 카스텔라 등 여러 간식을 준비해 병원 냉장고에 넣어 드리고 잘 챙겨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통화를 해보니 아버지는 거의 드시지 못했다고 한다. 아파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몸이 아플 때는 지근거리에 있는 음식조차 챙겨 먹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자식의 정성과 관심이 고맙기는 하지만 챙겨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 되면, 오히려 귀찮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의 행동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의 고통은 환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상상을 통해 공감하는 척하며 스스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할 뿐이었다.
잘려나간 나무에 집착할 것인가, 남은 나무 가지를 응원할 것인가?
'너희는 늙어봤니? 난 젊어봤는데'
라는 말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부족한 공감 능력과 얕은 경험을 반성했다. 그날 오후, 아내와 함께 저수지 주변 카페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 정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절반은 잘려나가 볼품없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생기 넘치는 잎들로 가득했다. 잘려나간 가지와 번성하는 잎들이 한 몸에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최근의 나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늙어가면서 병약한 부분은 잘라내서 없애고, 남은 힘으로 자신의 삶을 견뎌내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노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갱춘기)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에 빠진 나의 모습.
반은 잘려나갔고, 반은 풍성한 나무를 보며 나와 아버지는 삶에서 이미 잘려나간 부분에 매몰되어 절망이나 혼란에 빠져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세울 것인지, 아니면 남은 풍성한 가지처럼 태양, 바람, 물, 토양과 어울리며 더 큰 나무로 자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뎌낼 것인지 경계에 서있다.
갱춘기!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잘려나가 볼품없는 가지와 풍성한 가지 모두를 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내 안에 품기로 결심했다.
잘린 가지를 보며 과거의 상처와 실수를 반성하되 더 이상 되돌아보며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풍성한 가지를 보며 변화하는 자연의 생리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갱춘기의 혼란과 무기력감을 견뎌내는 지혜를 배우기로 했다. 아니, 그 카페의 그 나무는 이미 나에게 의미가 되어 지혜를 알려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담낭 수술을 통해 나의 부족한 모습과 이상향을 좇는 착각의 내면을 솔직히 마주하고, 나 외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낯선 환경마저 내 편으로 만드는 지혜를 배워가고 있다. 이 깨달음이 훗날 나 외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단단한 노년기로 나를 이끌어주기를 바라며 나의 삶을 생긴 그대로 수용하고 나부터 사랑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