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나는 9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그저 오래 만난 연인이라기엔, 더 많은 감정을 나눴고 서로의 깊은 상처까지도 껴안아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사이였다. 그 사람은 내게 사랑 그 이상이었으며, 안식처였다. 세상이 흔들려도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 그렇게 믿고 버텼다.
나는 그 사람과 죽음에 대한 대화를 종종 나누곤 했다. 언제는 한번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고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사실 꽤 진심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삶 속에 나라는 존재는 단 1%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버텨야만 했던 이유는 항상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졌고,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내 삶도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 사람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나는 나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나를 지탱해 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살았다. 그 누군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다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거였다.
처음엔 그 관계가 너무 특별해 보였다. 내 삶이 누군가로 인해 유지되는 방식이어도, 그게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면 괜찮다고, 그게 그 사람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만의 삶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 방식이 나를 끊임없이 아프게 하고 있었다는 걸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애써 외면하고 지내다 나는 결국 무너져버렸다.
그동안 쌓아온 감정들과 고통이 한꺼번에 덮쳐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선택을 했다. 다행히 상황은 수습됐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을 붙잡았던 건, 사랑이 아니라 내 생존 때문이었다는 걸.
그 사람이 내 전부가 되면서,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내 하루가 좌우됐다. 나는 나를 위해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관계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작아지고, 흐려지고, 결국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죽으려던 그날조차, 그 사람이 단 한 번만 나를 안아줬다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도, 나는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중요했던 거다.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했던 말, 기억난다. “그래서 내가 나쁜 놈이야?” 그 말이 예전엔 서운했지만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도 많이 억울하고, 지치고, 힘들었겠지. 내가 믿어달라 하면서도 상처를 줬고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든 견뎌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수록 더 아팠다. 지금도 그렇다. 그저 한 번만 안기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 예전처럼,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하지만 이번엔 확실히 안다. 그렇게 돌아가도 결국 또 같은 고통이 반복될 거라는 걸. 그래서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진짜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 이 말이 꼭 이별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앞으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은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을 내 삶의 중심으로 데려오는 연습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 글을 그 사람이 보지 못해도 괜찮다. 답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이건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고해성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