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단순한 재가 아니라, 살을 파고드는 죽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백두산 인근의 마을들은 지도에서 사라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것은 걷는 행위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숨을 쫓아 생존이 가능한 방향으로 몸을 내던지는 움직임이었다. 휴전선은 더 이상 그들을 막는 선이 아니었고, 생존과 소멸을 나누는 희미한 경계에 불과했다.
하늘은 붉고 탁한 구름으로 뒤덮였으며, 대지는 끊임없이 떨렸다. 산은 단지 폭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를 불태워 종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족 단위의 제한된 이동이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흐름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강처럼 부풀어 오르며 남쪽을 향해 울려 퍼졌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챙기고 집을 떠났다. 가축을 돌볼 여유도 없었고, 다시 돌아올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었다. 누구도 끝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일단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화산재는 머리 위를 완전히 덮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피와 금속 냄새가 폐를 찔렀고, 사람들의 입김은 검은 연기로 섞여 사라졌다. 한 어머니는 등에 업힌 아이가 울음을 멈추자 자신의 볼로 아이의 입을 단단히 가리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가면, 숨을 쉴 수 있어.”
그 말은 아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주문처럼 들렸다.
남한의 하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원도 북부에는 첫 화산재가 도달했고, 눈처럼 내리던 재는 도로 위의 자동차 엔진을 멈추게 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두르고 밖으로 나왔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한 채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재난문자는 연속으로 울렸고, 도심의 가로등이 한낮에 켜졌다. 서울의 하늘마저 어두워지자 사람들의 눈빛 속에는 처음으로 “이 나라조차 안전지대가 아니다”라는 현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휴전선 인근의 군 초소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초소장 박중위는 철책 너머를 바라보다가 숨을 삼켰다. 처음에는 안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행렬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흐름, 화산재에 뒤덮여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들. 어떤 이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고, 어떤 이는 두 손을 공허한 하늘을 향해 뻗은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울음도 잃었고, 절망을 표현할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전기가 울렸다.
“사격하지 마라. 그들은 적이 아니다. 정부 명령이다.”
이어진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떨림이 배어 있었다.
“1차 임시 수용 절차를 시행한다. 신원 확인, 검역, 보호. 질서를 유지하되, 물과 마스크를 제공하라.”
철책은 열렸지만, 사람들은 함부로 넘지 않았다. 그들은 철책 앞에서 멈춰 섰다. 그것은 더 나아갈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선이 인간이 만든 마지막 질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방독면을 쓴 채 천막을 세우고 생수통을 나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 조끼를 입은 이들이 망설임 끝에 난민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연민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한 난민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 군인의 손을 붙잡았다. 군인은 순간 몸을 굳혔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뜨겁고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자원봉사자가 물 수통을 들고 다가와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말없이 수통을 받아 입술을 대었고,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울음도, 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군인들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그 총은 경계를 위한 것이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태세가 아니라 생존태세였다. 그들은 철책을 넘어오려는 사람들을 막지 않았지만, 무질서가 생기지 않도록 손짓으로 줄을 정렬시키고, 임시 수용소로 안내했다. 모든 이동은 검역과 신원 확인을 전제로 이루어졌고, 난민들은 질서에 순응하며 조용히 줄을 이었다. 그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곳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임시적인 생존의 장소’ 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휴전선은 더 이상 군사적 긴장의 최전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마지막으로 지나야 할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 관문 앞에서, 총과 철책이 아니라 숨을 나눠 주는 인간의 손길이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