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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러시아의 조용한 점령

by 홍종원

백두산 폭발 이후 여섯 번째 밤. 함경북도 상공은 여전히 화산재가 흩날리고 있었고, 그 어둠을 뚫고 조용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전투기도, 장갑차도 아닌 러시아 제35군 혼성여단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산 기지에서 출발한 이 부대는 “난민 유입 차단”이라는 이름으로 움직였지만, 그들의 실제 목적은 국경 방어가 아니라 “통로 확보”였다. 나진항, 청진항, 두 항구가 바로 그 통로의 시작이었다.


러시아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불타버린 마을에 천막을 치고, 국기를 꽂는 대신 인도적 지원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첫 번째 위성 보고는 단호했다.
“1단계 구역 확보 완료. 항구 진입선 열림. 경제특구 지정 요청함.”
그 문장은 해방군의 보고가 아니라 ‘편입 준비 보고’였다.


모스크바 크렘린 비상회의실. 지도 위에 붉은 표시가 찍힌 지역은 평안북도가 아니라 함경북도의 해안선이었다.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장이 입을 열었다.
“중국이 내륙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바다를 가진다. 태평양의 문을 연 자가, 이 분쟁의 미래를 설계하게 될 것이다.”
그 말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이 작전은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한반도를 차지하든 반드시 러시아를 거쳐야만 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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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은 점령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국기를 내걸지 않았다. 대신 민간을 위장한 ‘극동개발공사’ 인력이 투입되었고, 나진항 부두에는 시베리아 철도 연결 공사가 곧바로 착수됐다. 주민들은 그들이 군인인지 공무원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이미 항구의 ‘내부 문’을 열어버렸다.


러시아의 진격은 눈에 띄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들은 평양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고, 기념 퍼레이드도 열지 않았다. 대신 나진과 청진의 부두를 복구하며 “항로 개방”이라는 명목으로 해군 보급선을 정박시켰다. 항구 입구에는 러시아군이 아닌 ‘극동 해양개발단’이라는 간판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건물 옥상에는 망원경을 든 해병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했지만, 공개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중국군이 내륙에서 행정구역을 재편하는 동안, 러시아는 해안선을 따라 별도의 관리구역을 설정했다. 두 강대국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서로가 ‘한 발 더 나아가는 순간’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 균형이야말로 러시아가 가장 원하던 국면이었다.


모스크바는 미국도 고려했다. 미국이 평양 핵시설에 집중하는 동안, 러시아는 자신들의 움직임이 “안보 협력”의 연장선으로 보이도록 연막을 쳤다. 국제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사이, 나진항에는 러시아 국방부와 에너지부가 공동 설립한 ‘북태평양 기지 관리청’이 들어섰다. 이름만 민간 조직일 뿐, 실질적으로는 군항이었다.


주민들에게 러시아는 점령군이라기보다,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존재’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식량 배급과 난방 연료가 제공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다.


“중국은 땅만 차지하더니 우리한테는 말도 없는데… 러시아는 그래도 뭔가 하긴 하네.”
“러시아 쪽으로 항구가 열리면 물자도 들어오고, 바깥 하고도 다시 연결될 수 있다던데… 그럼 좀 숨통이 트이지 않겠어?”


러시아는 군기를 내세우는 대신, “길을 열어준다”는 이미지를 조심스럽게 심고 있었다.
정면 대결도, 공개 선언도 없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서서히 그들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북한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질서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려 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미래의 주도권은 총칼이 아니라 ‘길과 자원, 통로를 쥔 국가가 갖게 될 것임을 러시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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