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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폐허 위에 피어난 손길

by 홍종원

백두산 폭발이 멈춘 지 일주일, 평양 이남의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위로 ‘남한 긴급구호단’ 차량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차량 번호판에는 군 마크뿐만 아니라, ‘자원봉사단’이라는 작은 표식도 붙어 있었다.


의료진, 소방 공무원, 민간 구조대, 대학생 봉사단까지.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밤새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왔다. 누군가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민족입니다. 끝까지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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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더 가져와! 저쪽에 아이들이 떨고 있어요!”
서울에서 온 간호사 최은영 씨는 뛰면서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옆에서는 경기도에서 온 자원봉사자가 조심스럽게 북한 할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지금부터는 저희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의 굳은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을 공터에는 임시 급식소가 설치됐다. 자원봉사자들은 이동식 취사차에서 뜨거운 국을 계속 끓여냈고, 군 장병들은 식량 상자를 나르며 사람들의 손에 직접 쌀과 빵을 건넸다.


줄을 선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오갔다.
“…저 사람들, 남조선 사람 맞나?”
“맞지. 그런데… 왜 우리를 이렇게 챙기지?”


처음에는 경계하던 눈빛이었지만,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살려는 주는 거 아닌가.”


그 말을 시작으로 공터의 공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계가 아닌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처음 맞이하는 낯선 희망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 시간, 국영방송을 통해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미국, 중국, 러시아가 각각 북한 북부 지역에 ‘임시 행정 구역’을 설치했다는 외신 보도가 들어왔습니다. 현재까지 우리 정부는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앵커는 ‘분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화면에는 새로운 선이 그어진 지도 이미지가 잠깐 등장했다. 강원도 위쪽에는 미군기가, 평안북도에는 중국군기가, 함경북도에는 러시아군 깃발이 표시되어 있었다.
단 몇 초의 화면이었지만, 국민들은 그 의미를 직감할 수 있었다.


“또… 나눠지는 건가?”
구호 텐트 안에서 TV를 보던 남한 봉사자와 북한 주민들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공기 자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구호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퍼져 있었다.
“분할”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북부 지역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병력이 진입했다는 뉴스가 이어지며, 불안은 빠르게 확산됐다.
현장을 누비던 자원봉사자들 역시 그 불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국방부 발표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예비군 1급 인원은 즉시 북부 복구 작전에 투입됩니다. 임무는 치안 유지와 주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발표 직후 전국 예비군 부대가 일제히 소집되기 시작했다.
서울, 부산, 대전의 30대 남성들이 군복을 다시 입고 북으로 향했다. 그들의 표정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그들은 전쟁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땅을 지키러 간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 지역에서 복구를 지휘하던 박태식 합참의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중국군이 새벽에 자강도 일대에서 병력을 재배치했습니다. 우리와의 직접 충돌은 피하고 있지만,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곁에 있던 장교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러시아군도 함경북도에서 정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잡지 못하면, 저쪽에서 ‘사실상의 점령선’을 확정해 버릴 겁니다.”


서지훈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 보고 회의에서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을 단순한 구호 활동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지금은 각 강대국이 ‘한반도의 미래 구조’를 짜기 시작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 땅의 운명은 또다시 우리 손을 떠나게 됩니다.”


구호 텐트 안에서는 남한 의료진이 북한 아이의 팔에 주사를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의료진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의료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분명한 다짐이 떠올랐다.
‘이제 이 사람들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


저녁이 되자, 구호소 여기저기에서 모닥불이 피워졌다. 남과 북 주민이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한 북한 주민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남쪽 분들이… 이렇게 바로 옆에 앉아 계시네요.”
곁에 앉은 남한 자원봉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땅인데,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노인이 불빛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다시는 갈라지면 안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남과 북이라는 이름보다 ‘우리’라는 감정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모닥불이 잦아들 무렵, 멀리서 들려온 방송의 한 문장이 조용히 이 분위기를 흔들었다.
“북한 북부 지역 일부가 외국 군에 의해 임시 행정 통제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씨는 피어났지만, 그 위로 어둠이 다시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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