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단 한 조각이라도
누군가는 가을이 낭만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나리는 낙엽을 보며 생각했다.
푸르렀던 생명의 순간을 지나
찰나에 타올랐다 저버릴,
죽음에 한걸음 다가가는 계절이로구나.
언제고 서든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보고 싶었다.
참 우스운 것은, 사람은 극적인 순간에
때론 냉철해지기도 한다는 것.
할머니를 중환자실에 입원시켜 드리고 오면서
어디엔가, 어디라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기억하는 당신이 아니기를.
불쌍하고 외로웠던 인생이 아닌,
넓은 이 세상 누군가가 함께 기억해 줄
당신이기를 바란다고.
이 세상 어딘가 단 한 조각이라도
당신의 흔적이 남겨지길 바라면서.
나의 할머니는 적지 않은 나이로,
크게 병치레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 할
어느덧 90의 가까운 연세에도
정정하게 삶을 살아낸 여성이었다.
몇 주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형제가 몇이었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아들이 하나뿐인
딸 부잣집의 셋째 딸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귀했던 그 시절
유난히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지혜롭고 야무진 셋째 딸.
아주 가난한 남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남자와
전쟁의 시절을 지나 뜨겁게 사랑했고
그 남자를 닮은 세 아들을 낳아 키워낸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
뜨겁기만 했던 사랑의 계절은 지나고,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해내지 못한
아들들의 뒤치다꺼리와
일찍 떠나버린 막내아들이 남기고 간
아들의 한 조각, 손녀딸을 부여잡고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던 어머니.
딸을 한 번도 키워본 적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지런히 머리를 땋아가며
그렇게 키운 손녀딸이 서른을 앞둔 어느 날,
그녀의 말이 부서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