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감정이 처음 든 날을 기억한다. 눈을 떴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지만,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알람은 끊임없이 울렸고, 메시지는 쌓였고, 세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지만, 나는 멈춰 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입술 끝에만 맴돌다 결국 삼켰다.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이 두려웠다. 또 하루가 시작됐다는 사실이 고통처럼 느껴졌고, 살아 있는 내가 아니라 그냥 움직이는 기능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은 그걸 게으름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의지 부족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감정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 안에는 너무 오래 참은 마음, 너무 깊이 들어간 피로, 너무 조용히 견뎌낸 날들이 들어 있다. 그런 날에는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좋아하던 일에도, 나 자신에게조차 애정을 줄 힘이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게 번거롭고, 귀찮고,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감정이 이상한 걸까?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계속해서 견디기를 요구받는다. 힘들면 쉬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쉬려 하면 의심부터 받는다. “왜?” “무슨 일 있어?” “좀 참아봐” 같은 말들이 나를 더 고립시킨다. 이 세상은 멈추려는 사람을 참지 못한다. 계속 움직여야만 살아 있다고 인정해주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감정은 마치 잘못된 것처럼 다뤄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려치우고 싶어도 때려치우지 못한다. 마음속에서는 매일 ‘이대로는 안 돼’가 울리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 정해진 루틴, 해내야 할 성과, 비교 속에서 뿌리내린 자격지심. 하루하루를 억지로 견디는 삶. 어릴 적엔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숨기게 됐고, 더 많은 기준에 맞춰 살아야 했다.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이고, 구성원이자 사회인이면서도 정작 나로 살아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였다. 어느 순간부터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기 시작한 건.
나는 그 말이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나를 되찾고 싶다는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오히려 솔직한 감정이다. 힘들다고 말할 용기, 그게 오히려 가장 단단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무너질 수 있다. 다만 무너질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그만두고 싶다’는 말보다 ‘그만해도 돼’라는 말이 더 절실하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어도, 눈물만 흘리고 있어도,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어도 괜찮다. 그런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쌓인 감정들을 풀어내고, 억눌린 나를 꺼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 시간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건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내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할 권리가 있다. 그걸 잊지 말자.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다 그만두고 싶다’고 느낀다. 그 감정은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다는 증거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나답게 되돌리는 하나의 신호일 수 있다. 그러니 괜히 스스로를 질책하지 말자. ‘나만 왜 이럴까’가 아니라, ‘나도 이럴 수 있지’라고 말해주자.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니까. 오늘 하루도 힘들었다면, 내일은 조금 더 나를 위해 살아보자. 아무도 몰라줘도, 나는 나를 알아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