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스펙이 아니야

by 괜찮지않은사람

누가 처음부터 그런 기준을 만들었을까. 나의 하루를, 내 선택을, 내 삶 전체를 점수로 나누고 줄 세우는 방식 말이야. 학교 다닐 땐 시험 점수로, 졸업할 땐 자격증으로, 사회에 나와서는 연봉과 직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언제부터 그렇게 단순해졌는지 모르겠다. 더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이력서 한 장으로 파악하려 드는 이 세상 앞에서 나는 자꾸 작아진다. 그들이 보려는 건 내가 살아온 날들이 아니라, 숫자와 타이틀, 그들이 납득할 만한 결과물뿐이라는 걸 알아버린 순간, 나는 존재가 아니라 스펙이 되어버렸다.

살아보니 안다. 스펙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이력도, 어느 순간에는 아무 소용없을 때가 있다는 걸. 누군가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자체로 충분히 대단한 사람인데, 그 모든 고생과 애씀은 숫자에 반영되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버틴 것도, 눈물 흘린 채로 출근했던 날도, 그저 생존하느라 마음을 눌러댔던 시간들도 전부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그러니 내 삶을 점수로, 줄로 세우지 말아줘. 나는 평가받기 위해 살아온 게 아니니까.

이상하게도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든다. 비교하고, 견주고,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불안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성장이라기보다 ‘조급함’일 때가 많다는 걸. 남들이 다 가는 방향이라 무작정 따라갔을 뿐,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는 걸.

나를 가득 채운 이력들이 하나둘씩 무너져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직업이 바뀌어도, 목표가 사라져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나 자신보다 타이틀을 먼저 말하게 될까. “어디 다녀요?”, “무슨 일 하세요?”, “어디까지 해봤어요?” 이런 질문들 속에 나라는 사람은 없다. 그냥 스펙이 전부인 것처럼, 아무리 말해도 내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삶은, 절대 스펙이 아니라고.

내가 했던 선택들이 전부 정답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안에 후회도 있고 상처도 있고 기쁨도 있었기에 그건 분명히 나만의 삶이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눈에 띄는 직업도 없고, 남들보다 빠르게 살지 않아도, 그건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이다. 나만의 리듬, 나만의 시간표, 나만의 기준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도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겐 분명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고, 얼마나 많이 고민했고, 얼마나 수없이 마음이 흔들렸는지 나만은 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삶은 값지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는 지금도, 나에겐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했다.

앞으로도 나는 자격증 하나, 직업 하나, 연봉 하나로 나를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그런 숫자로는 정의될 수 없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켰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으려 애썼는지가 진짜 기록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은 단 한 줄의 스펙보다 더 깊고, 더 단단하고, 더 찬란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켜낸 삶.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유다. 평가받고 줄 세우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버텨온 날들.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부족해도, 느려도, 평범해도. 이 삶은 나만의 것이고, 어떤 스펙보다도 값진 기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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