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by 괜찮지않은사람

언젠가부터 나는 하루를 ‘무엇을 했는지’로만 평가했다. 몇 가지 일을 끝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였는지, 그날의 성과를 줄 세우듯 기록하고 재단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맞추지 못한 날이면 어김없이 자책했다. ‘오늘은 쓸모없는 하루였어.’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지쳐 있던 시기에 나를 살린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아무 성과도, 목표도, 일정도 없던 그 시간들이 오히려 숨 쉴 틈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바쁘다’는 걸 미덕처럼 여겨왔다. 잠시도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빈 시간을 허비하면 죄책감이 찾아온다. 그래서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무너질 뻔했던 날, 나를 붙잡아 준 건 일정표가 아니라 공백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 소리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그 순간.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조금씩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게으름과 다르다. 게으름은 해야 할 일을 피하는 행위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쉬게 하는 선택이다. 몸이 지칠 때 잠을 자는 것처럼, 마음이 지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회복이다. 오히려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이 소모되다가 결국 부서지고 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는, 세상과 거리를 둔다. 휴대폰을 멀리 두고, 메신저 알림을 꺼두고, 억지 대화를 만들지 않는다. TV를 켜지 않아도 좋고,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냥 창문 너머로 빛이 드는 걸 보거나, 고요 속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처음엔 그 정적이 낯설고 불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내 호흡이 안정되는 걸 느낀다.

이렇게 멈춰보면, 평소에는 지나쳤던 감각들이 돌아온다. 차가운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온도, 부엌에서 끓는 물이 내는 사소한 소리. 그 모든 게 나를 지금 이곳에 묶어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의 후회로 뒤섞였던 마음이 현재에 머무르는 순간,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억지로 짜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쉬는 동안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욕구들이다. ‘이 노래를 들어야지.’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야겠다.’ ‘그동안 미뤘던 글을 써볼까.’ 이런 생각들이 들 때, 나는 다시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지금은 쉬어야 할 때인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그 사실을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공허가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토양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쓰러진 뿌리를 추스르고, 다시 뻗어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 시간을 낭비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나를 버티게 해 준 숨구멍이었다. 그 숨구멍이 있었기에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멈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 되찾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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