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

by 괜찮지않은사람

슬픔은 폭풍처럼 몰려왔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 ‘가라앉음’은 우리가 억지로 당겨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조급하게 흔들어 깨우면, 깊숙이 가라앉으려던 슬픔이 다시 거품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예전의 나는 슬픔을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스스로를 추슬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웃음을 지어야 주변이 안심한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가라앉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처음엔 감정의 무게가 버거워 몸이 휘청거린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사람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요한 무력감 속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마음속에 차 있던 물이 조금씩 밑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 그때 나는 알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 감정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지나가게 두는’ 거라는 걸.

기다린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아직 덜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다. 세상은 자꾸만 우리에게 빨리 회복하라고, 다시 웃으라고, 정상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마음은 기계가 아니다. 버튼을 누른다고 즉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내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아 스스로 잔잔해질 때까지.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달래는 작은 습관들을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조건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마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글로 감정을 쏟아냈다. 그 글들이 꼭 의미 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마음속을 흐르는 대로 적었다. 그러다 보면 문장 속에 내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그게 마치 슬픔을 바깥으로 옮겨두는 의식 같았다.

또한 나는 불필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였다. 억지로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건, 내 감정을 배신하는 일 같았다. 대신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 한두 명과만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내 슬픔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 주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회복됐다. 가라앉는 데에는 말보다 침묵이, 조언보다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이 왔다. 이유 없이 숨이 조금 더 가벼워지고, 음식 맛이 조금 더 진하게 느껴지고, 바람이 시원하게 스쳤다. 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변화는 조용하지만, 확실하다는 것을.

이제 나는 슬픔이 올 때마다 애써 쫓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리를 내어주고 앉힌다. 그리고 속삭인다. “괜찮아. 네가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그렇게 기다리면, 슬픔은 언젠가 스스로 잔잔해진다. 그때 남는 건 부서진 내가 아니라, 더 단단해진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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