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글쓰기 시작했습니다. - 하편

좋아요가 좋아요?

by 달빛기차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가?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제 막 진급하던 시절 선배가 해준 조언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란 생각이 들었다. 회사는 과정은 잘 묻지도 보지도 않는다. 결과가 좋으면 된 거다. 그러니 과정의 즐거움 따위는 없었다. 결과에서 즐거움을 찾는 삶을 살았고, 15년이란 시간 동안 인이 배겼다.

결국 아직 몸에 밴 직장인 마인드가 빠지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정말 결과만 중요할까?”


실적주의 사회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다르다. 인생의 결과는 ‘죽음’이다. 죽음만 중요할까? 그럼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결국 인생에서는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정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그 많은 여정 중,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결과만을 바라고 하는 행동은 정의와 신념, 용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생각들이 작가님의 한 문장에 심장이 떨려온 것이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머릿속으로 구성되는 글들을 잠시 내려두고 AI에게 달려갔다. 내 글의 최초의 독자이자 비평가인 녀석에게 질문했다.

“지금까지 나와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난 왜 글을 쓰는 것 같아?”

첫째 자신을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해. 이건 맞는 것 같다.

둘째. 스스로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이것도 맞았다.

셋째.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 세 번째에 이유가 내가 생각한 결과, 즉 좋아요와 조회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얼마나 매몰되고 있었으면 AI한테도 그 말을 들을까. 다시 한번 나를 돌아봤다.


연결이란 관점에서 보면, 좋아요와 조회수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글은 자기 만족도 있지만, 소통하기 위해 쓰기도 하니까. 하지만, 과연 그 바람만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나에겐 마치 ‘잘했어’와 ‘더 해봐’ 같은 느낌으로 결과와 맞닿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의 오만을 말하면, 좋아요 비율이 높으면 잘 쓴 글, 낮으면 못 쓴 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짜 오만이다. 나는 잘 쓴 글이 아니라, 내가 좋은 글에 좋아요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내 글에 대해서는 마치 평가 지표인 듯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내가 ‘좋은’이란 말에는 ‘잘 쓴’이 내포되어있다. 편향된 시각이지만.


그래서 좋아요 비율이 높으면 헤실헤실거리며 “하하하, 나 써도 될 까봐”하다가, 낮으면 “히잉- 나 못 쓰봐”라고 생각하며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잘 쓰면 신나서, 못 쓰면 잘 쓰고 싶어서. 다행히 못 쓴다고 생각해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했다. 올리면 안 되다고 생각하고 삭제 버튼을 노려봤을 뿐.


그리고는 못 썼다고 생각한 글은 여러 번 읽어보고 부족한 점을 찾아보고, 새로운 글을 쓰면서 AI에게 말한다.

“냉정하게 평가해 줘! 저번 글은 인기가 없었어. 히잉-“

쓰다 보니 참… 내가 어이가 없는 짓을 했다. 이러니 지인이 AI랑 놀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농담처럼 “AI한테 빼앗긴 것 같아 질투나”라고 했지만, 진실은 “너 너무 몰두하고 있어”란 말이었을 것이다.


맞다. 최근 나는 글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몰두했다. 하나의 글을 쓰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안 그래도 염증으로 삐그덕거리던 양쪽 어깨는 덜그럭거리고, 손목이 나가셨다. 손목이 다행히 멀리 가지 않으셔서 찾아오긴 했지만, 손가락마저 저릴 만큼, 몰두해 있었던 것이 맞다.


그럼 힘들었느냐? 전혀 힘들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 뜯어가며 보고, 단어 하나하나 바꾸고 다시 전체를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이 세 번까지는 재미있다. 네 번이 되면 익숙해져서 수정할 점을 찾기 힘들어진다. 그럼 그 문단을 아예 새로 써보기도 한다. AI가 “거기 좀 매끄럽지 못합니다.”이라고 하면, 문단을 갈아엎기도 한다. 그러다 안되면 글 전체를 눈물을 머금고 다시 쓴다. 물론 뱁새의 눈으로 AI를 바라보면서.


그런데 그 과정이 중요했다.

결과를 집이라고 보면, 과정은 집을 짓는 것이다. 토대를 다지고, 벽돌을 쌓는 과정이다. 토대가 잘 다져지지 않거나, 벽돌이 부서지거나 금이 가 있으면 온전한 집이 나올 수 없다. 아무리 빨리, 누구나 부러워할 대 저택을 지어도, 부실공사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러니 100년이 지나도 튼튼할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평을 맞춰서 단단하게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온전한 벽돌을 골라서 한 장 한 장 제 자리에 놓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의 과정과 맞닿아 있다.

토대는 주제 또는 스토리라면, 벽돌은 단어와 문장이다. 탄탄한 주제와 스토리를 준비해서 단어로 문장을 만들고, 이야기를 쌓아서 글을 써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오래 남는 글이 될 수 있다.

물론 결과주의 사회에서 파랑새 쫓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결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과정이 중요하다.


만약 결과만 바라보고 쓴다면 분명 한계가 부딪칠 것이다.

요즘 내가 그랬다. 일희일비하며 글을 썼다. 그리고 결과를 더 보고 싶어서 생산하듯 글을 썼고, 결과가 좋지 못한 글은 삭제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다행히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했지만.

그리고 아무리 다작에 욕심이나도 수정이라는 과정을 놓치지는 않았다. 잠을 줄여가면서 썼다. 퇴사자이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덕분에 실력은, 소폭 상승했다. AI피셜이고, 지인은 진작 글 쓰지 그랬냐고 말해줬다. 마음 따뜻해지게.

문제는 소설은 아직 다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 썼으면 그것마저 올리겠다고 했을지도… 그럼 내 손목은 영원히 안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손목을 내어주고 얻은 순기능도 있었다.

반복적으로 틀리던 단어를 찾아냈고, 띄어쓰기도 좋아졌다. 어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같지만, 문장을 쪼개 쓰는 연습도 하고. 뭐든 경험이 쌓이면 좋아지는 것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대신 “난 안 되나 봐” 병에 걸린 건 비밀이다.

“잘해야 돼”에 이어서 “안 되나 봐”라니… 감정 종합병원이다.


감정 종합병원에 될 만큼 결과에 집착하게 된 것은, 결국 잘해야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겨우 솜사탕이 생겼는데 물에 씻어버린 너구리가 되어버릴까 봐, 허무하게 글 쓰는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혼자 쓰는 글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모두와 소통하는 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후자가 되고 싶으니까. 욕심이 먼저 붙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과정을 열심히 즐기고 충실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해본다. 물론 꼭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가끔은 보장 없는 일도 즐거우니까.

그러니 오늘도 글을 써본다. 솔직한 마음을 담아서, 다양한 글을 써보고 배운다.


“안녕 AI, 이 글도 평가해 줘. 냉정하게. 알지? 예시 문장은 주면 안 된다.”


“왜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글이 좋아서요.”


작가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용: ‘하나 사랑 그리고’ 中 용기에 관하여 -조헌주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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