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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챕터 21: 야나기 케이의 비극

by BumBoo

야나기 케이.


나의 이름이다.


혹은, 그렇게 불렸어야 할 이름이었다.


할아버지 칸조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기반으로


사업을 크게 벌이셨다.


나의 유년 시절은 그야말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살던 저택은 거대한 성채와도 같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삼층 건물은 늘 윤기가 흘렀고,


끝없이 펼쳐진 정원에는 사계절 내내 희귀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침이면 기사가 모는 검은 세단이 현관 앞에 대기했고,


가정부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준비해 두는 듯했다.


숨소리만 조금 크게 내어도 모두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의 부모님들 역시 혹여 외아들인 내가 다치기라도 할까 금지옥엽 나를 키우셨다.


세상은 마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난감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날,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다음 날 바로 저택 옥상에 최신식 천체 망원경을 설치해 주셨다.


맑은 날 밤이면 나는 망원경을 통해 까만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을 보며 잠이 들곤 했다.


생일이면 저택의 넓은 홀에서 수십 명의 친구들과 파티를 열었고,


거대한 케이크는 늘 내 키보다 높았다.


가정부들은 내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모든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한 번은 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탐스러운 붉은 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나의 것이었고,


불행이나 결핍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화창한 오후였다.


나는 정원에서 아버지가 새로 사준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낯선 남자들이 구둣발로 현관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집안 곳곳에 빨간딱지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붉은색 종이 조각들은 마치 저택의 화려한 벽지 위에 피어난 끔찍한 핏자국 같았다.


아버지의 골프 가방에도, 어머니의 피아노 위에도,


심지어 내 장난감 상자에도 붉은 딱지가 붙었다.


나는 그 빨간딱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른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늘 활기 넘치던 집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부도의 충격은 남편의 행방도 모른 채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어머니의 몫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저택을 떠나 좁고 허름한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음습한 곳이었다.


방 안에는 고약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눅눅한 습기가 가득했다.


가엾은 어머니는 낮에는 허드렛일을 찾아다녔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남의 집 청소를 하며 손마디는 거칠게 갈라지고 붉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밤에는 낡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 없는 울음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은 나날이 메말라갔고, 눈빛은 초점을 잃어갔다.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차츰 빛이 사라져 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 날이 잦아졌다.


한때 가정부가 만들어주던 산해진미는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배가 너무 고파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듯 나를 끌어안고 낡은 쌀통을 뒤적였다.


겨우 찾아낸 쌀 몇 톨로 죽을 끓여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새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망원경으로 보던 별들은 이제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어린 나이에도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머니의 우울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는 며칠씩 아무 말 없이 벽만 응시했고, 내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고,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졌다.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숟가락을 놓았고,


밤에는 잠꼬대처럼 아버지를 찾으며 흐느꼈다.


때로는 텅 빈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미소는 따뜻함이 아닌, 깊은 절망과 광기마저 느껴지는 섬뜩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내가 알던 어머니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안아주지 않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거나, 이유 없이 흐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작은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곤 했다.


나의 존재가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것이라며


빨간딱지로부터 꼭꼭 숨겨둔 옥가락지를 물려주었다.


차가운 옥의 감촉이 내 작은 손바닥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온기, 그리고 알 수 없는 과거의 무게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는 옥가락지를 쥐여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세상의 모든 빛을 잃은 듯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방 안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해서 오히려 불길했다.


어머니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조여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작은 방을 나섰다.


낡은 복도 끝, 부엌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 쿵, 쿵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부엌문을 완전히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나의 어린 심장을 산산조각 찢어발겼다.




어머니는 천장에 매달린 낡은 끈에 목을 매단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낡은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은 공허하게 감겨 있었다.


발아래에는 엎어진 의자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핏기 없는 얼굴, 늘 나를 감싸주던 따뜻한 손은 이제 차갑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발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머니의 죽음. 그 비현실적인 광경 앞에서 나의 모든 감각은 마비되었다.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텅 빈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진,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절규였다.



"엄마…! 엄마 아아아…! 안 돼… 엄마…!"



어린아이가 낼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비통한 울부짖음이


좁은 방 안에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나는 어머니의 차가운 다리를 붙잡고,


그녀의 몸을 흔들며 울고 또 울었다.


살려달라고, 제발 눈을 떠 달라고,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쏟아져 내렸고,


목은 갈라져 피가 날 것 같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세상이 나를 완전히 버린 듯했다.


천애 고아가 된 나는, 차가운 옥가락지를 쥔 채,


어머니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날 밤, 나는 세상의 모든 희망과 온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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