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3: 복수의 서막
이시하라 할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던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낡은 다다미 방의 천장을 응시하며 밤을 새웠다.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단순한 분노나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핏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유전자가 깨어나는 듯한,
알 수 없는 사명감이었다.
노도술.
그 이름은 이제 내게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었다.
나의 할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채고,
나의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
그리고 그가 훔쳐간 유물들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 이자, 나의 미래였다.
나는 노도술을 찾아야 했다.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그가 남긴 유물을 되찾아와야 했다.
그것이 야나기 케이,
즉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시하라 할아버지에게 노도술의 행방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이시하라 할아버지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노도술이 멀지 않은 도시 외곽에서
'에덴 보육원'이라는 쓰러져가는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인자가, 그것도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니.
나는 직감했다.
분명 무슨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그의 위선적인 행동 뒤에는 필시 탐욕스러운 목적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노도술의 실상을 직접 파헤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에덴 보육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시하라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에덴 보육원의 낡은 대문을 들어서자
뿌연 흙먼지 냄새와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인 공기가 나를 맞았다.
노도술은 보육원 마당에서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탐욕스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번지르르한 얼굴에는 위선에 가득 찬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의 눈빛은 끈적한 욕망으로 번뜩였다.
그야말로 역겨운 인간이었다.
이시하라 할아버지는 노도술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노 원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시하라입니다."
노도술의 눈이 이시하라 할아버지를 훑었다.
그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함께 의문이 스쳤다.
"이시하라? 아아, 그래. 그 옛날…. 오랜만이군요. 웬일인가요?"
노도술의 시선이 이시하라 할아버지의 옆에 선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시하라 할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노도술에게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제 친손자입니다. 한국 이름은 유태경.
제가 폐암으로 곧 죽을 목숨이라…
더 이상 이 아이를 돌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염치없지만, 노 원장님께서 부디 이 아이를 거두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이시하라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노도술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의 입가에 위선적인 미소가 더욱 깊게 파였다.
계산적인 눈빛이 나를 훑었다.
"아니, 이시하라 선생. 딱한 사정이구려. 걱정 마시오.
아이는 죄가 없지. 제가 책임지고 잘 돌보겠소."
그는 내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역겨운 손길이었다.
그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노도술은 이시하라 할아버지의 오랜 인연과 그의 '딱한 사정'을 빌미로 나를 보육원에 받아들였다.
그의 눈에는 또 한 명의 '쓸모 있는' 아이가 들어온 것일 터였다.
처음 며칠은 조용히 보육원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이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공포와 체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노도술에게서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의 행방을 알아내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방해요소가 있었다.
바로 노도술이 아들처럼 여기는 '도꾸'라는 녀석이었다.
노도술은 그 녀석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고,
녀석은 노도술의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처음에는 이 도꾸라는 녀석을 먼저 없애 버릴까도 생각했다.
고아 녀석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을 관찰한 결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도꾸라는 녀석 또한 노도술에 대한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눈빛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노도술의 '꿩 사냥'에 매달 따라다녔고,
유물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잘만 이용하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아군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주위를 맴돌며 나불대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녀석이 먼저 노도술을 죽이겠다고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말해주었다.
실행에 필요한 농약은 진작에 구해 아무도 몰래 땅 속에 묻어 두었었다.
녀석은 나의 계획에 눈을 빛냈다.
첫 번째 시도는 간단했다.
노도술의 사무실 주전자에 농약을 타는 것.
그러나 이 멍청한 도꾸 녀석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아니면 노도술의 눈치가 빠른 것인지,
계획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노도술은 농약이 섞인 물을 조금 맛보더니,
"여름이라 물이 상했나?"라고 중얼거리며
주전자 안의 물을 모두 버리고 말았다.
그의 코는 짐승처럼 예민했다.
계획이 실패하자, 나는 더욱 확실한 방법을 생각했다.
노도술이 술에 만취해 곯아떨어진 밤.
도꾸는 나의 지시대로 한수련 부원장을 사택 밖으로 불러냈다.
나는 보육원 숙소를 빠져나왔다.
낡은 복도를 걷는 내 발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듯했다.
혹시라도 다른 아이들이 깰까 봐 숨소리마저 죽였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 깊이 파고들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사택으로 향하는 길은 칠흑 같았다.
발아래 마른 나뭇가지가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에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노도술이 깨어날까 봐, 그 짐승 같은 육감이 나를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그는 숨소리마저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사택의 문에 다가섰다.
문은 예상대로 살짝 열려 있었다.
도꾸가 한수련 부원장을 불러내며 일부러 열어둔 것이리라.
그 틈새로 역한 술 냄새가 비릿하게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열린 문틈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사택 안은 어둠과 술 냄새로 가득했다.
낡은 마루는 삐걱거렸고, 내 심장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노도술이 잠든 방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그의 거친 코골이 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들려왔다.
나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 널브러진 노도술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역겨운 숨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다.
그는 마치 거대한 돼지처럼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손에 잡히는 차가운 식칼의 감촉.
칼날은 희미한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 칼날은 마치 내 안에 응축된 분노를 그대로 담아낸 듯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나는 칼을 움켜쥐고 노도술이 잠든 침대로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세상의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니.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분노가 손끝으로 전이되는 듯했다.
칼을 든 손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통제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할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몰락, 어머니의 비극.
그 모든 원한이 칼날 끝에 모이는 듯했다.
나는 칼을 치켜들었다.
칼날은 달빛을 품은 채 더욱 빛을 냈다.